2019년 04월 5주차

BOOK SUMMARY
 인문 

술에 취한 세계사

저자 마크 포사이스(역:서정아)
출판 미래의창
출간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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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세계사


술 취한 원숭이의 출현

농경의 시작과 술

해부학적으로 우리와 같은 현생 인류는 15만 년 동안 존재해왔으며 그중 처음 12만 5,000년은 그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시기였다. 추정컨대, 그 기간 동안은 술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선사시대 인류는 기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캐며 동굴에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꿀벌과 관련하여 재미난 이론이 있다. 나무 구멍에 있는 벌집을 떠올려보라.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고 벌집이 빗물로 가득한다. 빗물과 벌꿀이 대략 2 대 1 비율로 섞이면 곧바로 발효가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후에 맨 정신의 목마른 원시인이 지나가다가 상당히 놀라운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연 벌꿀술 mead 이었다. 그 원시인은 맛도 보았을 것이다. 인간은 꿀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 때문이다. 맛은 꿀과 똑같았겠지만 취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벌꿀 이론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과일을 따서 거의 물이 새지 않는 곳에 저장해야 한다. 바닥에 고인 과즙에서 거품이 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원시적인 과실주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과실주를 얻으려면 한동안은 같은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어떤 고고학적 증거를 보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이동해 다녔다.


그렇다면 인류가 정착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서다. 인류는 식량을 재배한 다음에 술을 만들고 거대한 신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문명인이 되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만 순전히 엉터리 이론일 가능성도 아주 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이다. 제대로 된 지붕이나 벽이 지어지지 않았으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특이한 공간이다. 그 근처에 주거지가 있었다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어째서 이런 건축물을 지었을까? 괴베클리 테페에는 돌로 만든 큰 대야 몇 개가 있다. 가장 큰 대야는 약 151리터 정도의 용량이며 수산염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화학물질은 보리와 물이 섞일 때 생성된다. 그 때문에 괴베클리 테페는 여러 부족이 모여 다 함께 맥주를 마셨던 일종의 연회장으로 추정된다.


물론 어느 학설이나 그렇듯이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일각에서는 맥주가 건설 작업의 대가로 지급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어떤 학자는 맥주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그곳 사람들이 그저 큰 대야에 물과 보리를 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맥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전이 지어지고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맥주가 존재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를 다시 쓸 만한 이론으로 연결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까닭은 식량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식량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까닭은 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 근거 때문이다. 첫째, 맥주는 불을 피운 화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빵보다 만들기 쉽다. 둘째, 맥주는 인류가 건강과 튼튼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타민 B를 함유하고 있다. 셋째, 맥주는 빵보다 훨씬 나은 식품이다. 넷째, 맥주는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마실 수 있다. 다섯째, 맥주의 알코올 성분은 해로운 미생물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맥주의 원료인 물을 정화한다. 그러나 여섯 번째이자 가장 타당한 이유는 행동을 바꾸려면 문화적 원동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기원전 9000년경의 인류는 주기적으로 술에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농경을 발명했다. 농경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술에 관한 정확하고 분명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과실주는 주석산 찌꺼기로 인해 고고학적으로 적합한 증거를 남긴다. 중국에서 과실주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는 기원전 7000년으로 추정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빚어진 과실주의 흔적이 이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과실주가 서족으로 퍼져서 지중해까지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전파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흔적들은 캄캄한 오리무중 속에서 찾아낸 소소한 고고학적 단서에 불과하다. 두 번째 결과는 부차적인데 바로 문명의 출현이다.



고대 세계의 음주

아테네의 심포지온

고대 그리스인들은 맥주가 아닌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물과 포도주를 약 2~3 대 1의 비율로 섞어서 포도주의 도수를 물에 가까울 정도로 희석했다. 고대 그리스인의 희한한 특성을 드러내는 풍습이다. 그들은 만사를 ‘복잡하게’만들었다. 그 덕분에 자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취미 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나 남색이나 음주나 조각보다도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국의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일반적으로 외국인으로 묘사되는 게 조금은 놀랍다. 디오니소스는 현재의 에티오피아나 아라비아, 때로 인도에 있는 산으로 추정되는 니사 Nysa 산에서 태어나 이국적인 동물 무리와 춤추는 사람들, 켄타우로스와 그밖에 신화 속 생물들을 이끌고 동쪽에서 그리스로 이동해왔다. 디오니소스 신화는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신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해적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이 다양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다. 디오니소스는 그들을 동물로 변식시키는 식으로 벌한다. 이야기의 교훈은 상당히 명확하다. 포도주를 다룰 때는 반드시 강력하고 신성한 존재를 다루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항상 동물과 결부되었다. 그는 사자와 호랑이가 끄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말인 켄타우로스뿐만 아니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염소인 사티로스와 돌아다녔다. 디오니소스는 실레노스라는 인간 친구가 있었지만 실레노스는 말의 귀와 꼬리를 지녔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실제로 디오니소스에게 온전한 인간 친구라고는 마이나데스밖에 없었다. 마이나데스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자들이었다. 마이나데스가 정말 존재했는지, 아니면 아마조네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남성들이 품고 있던 성적 환상에 불과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두 번째 유형.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으로서 당연히 금주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음주는 위험한 행위이며 사람이 술을 마시면 사나운 야수로 돌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술을 마셔야 한다. 절대로 파티 초대를 거절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음주를 금지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음주가 운동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남겼다. 플라톤에 따르면 처음 술을 마시면 기분이 몹시 나빠지고 고통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훈련을 거듭하면 술을 마셔도 끄떡없다. 술을 많이 마셔도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면 이상적인 인간이다. 플라톤은 자제력이 용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위험에 빠질 때만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실 때만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기는 습득이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은 취한 상태일 때 믿음직한 사람이면 어떤 경우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모든 내용을 종합해보면 금주하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적 결론이 도출된다.


이와 같이 고대 그리스에서 음주는 이상하고 미묘한 일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제정신을 잃지 말아야 했다. 술에 취해도 미덕을 발휘해야 했다. 포도주의 풍랑을 헤치고 꾸준히 배를 저어가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현장이 주연의 일종인 심포지온이었다.


심포지온

고전 시대 아테네의 귀부인들은 술에 취하고 싶을 때 어떻게 했을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은 심포지온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심포지온은 주거지의 개인 공간인 안드론에서 열렸는데 안드론은 직역하자면 ‘남성용 방’을 뜻한다. 요약하자면, 심포지온에 참석하는 사람은 남자들이었고 심포지온은 술집이 아니라 개인 가정에서 열렸다.


심포지온의 첫 순서는 식사였다. 참석자들은 우선 간소한 식사를 대화 없이 재빨리 먹어치웠다. 음식은 대단할 것이 없었다. 심포지온의 음식은 술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안드론으로 갔다. 안드론은 집의 중앙에 있는 둥그스름한 방으로서 석조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방구석에는 쿠션이 놓인 소파가 빙 둘러져 있었다. 남자들은 팔 밑에 베개를 하나씩 끼고 소파에 누웠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눕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그날 저녁의 술자리를 주도할 심포지아크 symposiarch 를 뽑아야 했을 것이다. 심포지아크의 첫 번째 임무는 포도주를 고르는 일이었다. 아테네의 상류층 남성들은 대부분 포도밭을 소유했기에 심포지온에 사용된 포도주도 심포지아크의 포도밭에서 공수되었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술을 들이키기에 앞서 헌주libation 의식을 치러야 했다. 헌주는 신들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바닥에 최고급 포도주를 뿌리는 식으로 이뤄졌다.


아테네 사람들은 계획적으로 술을 마셨다는 점에서 현대인과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현대 서구 세계의 파티에서는 사람들이 실수로 술에 취하고 도에 넘치도록 술을 마시는 경우가 흔하다. 심포지온에서는 실수로 술에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포지온에서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개적으로 술에 취했다. 심포지아크가 술을 마시라고 말해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심포지온의 손님들은 술을 얼마나 마실지 정하지 않았듯이 그날의 대화 주제도 정하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는 대화를 나눌지조차 결정하지 않았다. 대화는 심포지아크가 주제를 정하면 손님이 각자가 차례대로 주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내놓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심포지온의 끝은 저마다 달랐다. 조용히 집에 가는 사람도 이었지만 소파에 그대로 눕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곳에서 그대로 자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모두가 길을 누비고 다니면서 고성방가로 일부러 이웃들을 깨우는 코모스 komos 에 동참했다.



코란, 바이킹, 맥줏집 그리고 풀케

중세의 맥줏집과 펍의 탄생

중세의 선술집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주막에는 뺨이 발그레한 촌사람들이 바 주위에 모여서 풍만한 여급이 따라주는 거품 이는 진짜 잉글랜드 맥주를 큰 잔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석에는 깽깽이를 켜는 사람이 있었고 바깥에는 칠한 간판이 밤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자기가 연 술집에 십 인Ship Inn 혹은 십 태번 Ship Taern이란 상호를 붙이거나 단순히 십Ship이라고만 해도 아무도 주목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중세부터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주막과 선술집과 맥줏집 사이에는 아주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주막

주막inn 은 숙박업소이고 그것 때문에 다소 비쌌다. 숙박업소이니만큼 숙소와 함께 마구간이 딸려 있었다. 귀족이 여행을 할 때 주막에 묵었다. 사실 방은 싼 편이었고 주막 주인은 손님에게 고급 식사, 포도주, 세탁, 마구간 이용 같은 부가 서비스 비용을 청구해 돈을 벌었다. 주막은 규모가 큰 읍이나 대개는 도시에 있었다. 시장 광장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주막 건물은 대개 널찍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재판이 주막에서 열리는 일도 있었다.


선술집

선술집taern은 포도주를 판매했다. 포도주는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비쌌다. 선술집은 대략 오늘날의 칵테일 바에 상응하는 사교 장소였다. 마을 칵테일 바가 없듯이 마을에도 선술집은 없었다. 선술집은 약간의 현금을 뿌리고 싶어 하는 부유층 남자들이 찾는 장소였기 때문에 대부분 런던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퇴폐적인 면도 있었다. 선술집은 매춘부와 도박꾼이 출몰하는 장소였다. 포도주에 돈을 지불할 형편이 되면 다른 사악한 쾌락에도 값을 치를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맥줏집

1200년의 잉글랜드에는 펍이란 곳이 없었다. 마을에는 술을 파는 곳이 전혀 없었다. 펍이 없는 까닭은 펍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언제 어디에서나 술을 마셨다. 그들은 일터에서 술을 마셨다. 임금의 일부로 맥주가 지급되는 일도 많았다. 술은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들판에서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하는 동안 띄엄띄엄 몇 파인트 마셔보았지만 술에 취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맥주를 마시면 속이 든든해졌다. 한마디로 맥주는 액체로 된 빵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세 영국 남성은 집에서 술을 마셨다. 중세 영국 여성과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만 해도 물은 상당히 위험해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마셨다.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서 기본적으로 보리와 물과 가능하다면 약간의 향신료만 필요했다. 따라서 남편이 들판에 일하러 나간 동안에 아내는 맥주를 양조하게 마련이었다.


수익을 얻기 위해 맥주를 양조하는 여성을 맥줏집 안주인이라고 불렀다. 중세 맥주는 유통기한이 굉장히 짧았다. 이틀이나 사흘이면 변질되었다. 따라서 맥줏집 안주인이 식구가 마실 양보다 많은 맥주를 양조하면 대문 위에 맥주 막대라는 것을 꽂아 두었다. 맥줏집 안주인은 집 앞에 술통을 내놓고 큰 병과 동전을 들고 나타난 행인들에게 맥주를 팔았다. 여분의 맥주가 다 팔리면 맥줏집 안주인은 맥주 막대를 내리고는 다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14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첫째,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교회에서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내 음주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토지 경작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한때는 귀족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14세기의 귀족들은 농민에게 땅뙈기를 빌려주고 직접 농사를 짓게 하는 편이 훨씬 더 간편하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맥주 양조에 능숙한 아내를 두지 못한 농민은 나가서 자기가 마실 맥주를 사와야 했으니 맥줏집 안주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목이 타는 일꾼들이 일이 끝난 후 맥주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앉아서 마실 곳도 요구했다. 그러자 맥줏집 안주인들은 자기 집 주방에 손님들을 들였다. 이렇게 해서 펍이 탄생했다.



금주의 정치학

미국 금주법의 빛과 그림자

누가 금주법을 원했는가

금주운동은 보수주의 운동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본래 취지는 국가의 개혁과 진보를 도와 역사상 유례없는 금주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중서부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마지막으로 금주법 운동은 (가장 놀라운 점인데) 알코올 반대 운동이 아니었다.


살룬을 몰아내는 것이 본래 목표였다. 서부 전역에는 남편이 살룬에 가서 번 돈을 모두 써버리고는 땡전 한 푼 없이 집에 돌아가 성질을 부리며 아내를 구타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가정 폭력은 피해자가 당하는 동안에는 통계를 내기가 어려운 범죄로 알려졌다. 서부의 오두막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어느 정도 확률로 일어났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그런 주제로 희곡과 소설을 썼다. <술집에서 보낸 열흘 밤과 내가 그곳에서 본 것>은 당시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미국 소설이었고, 후자와 더불어 헌법수정을 넌지시 제안한 책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술꾼들조차 금주법을 고대한다.


그 결과 미국 여성들의 정치적 대오 각성이 일어났다. 그 당시 여성들은 살룬이나 투표소에 입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리로 나가 살룬 바깥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누구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1873년에 미국 여성들은 여성기독금주조합을 설립했다. 1890년대에는 금주운동만을 목표로 창설된 반살룬동맹 ASL : Anti-Saloon League 이 뒤를 이었다. 미사여구와 본래 취지를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두 단체가 반대한 것은 알코올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룬에 드나드는 남자들의 행동 패턴에 반기를 들었다.


인터넷 시대에 금주법이 시행된 기간을 특정하기란 굉장히 쉽고 간단하다. 금주법 시대는 1920년 1월 16일에 시작해 1933년 12월 5일에 막을 내렸다. 단, 실제 기간은 이와 달랐다. 주정부 차원의 금주법은 이미 50년도 더 이전에 등장했다. 메인주가 1851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행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몇 년 후에 법을 폐지했다. 1913년에는 미국민 과반수가 어떤 형태로든 주정부가 시행한 주류 금지 조치의 적용을 받았다. 여성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독일인들은 패배하고 있었다.


금주운동의 원동력이 중서부의 기혼여성들이었다면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양조업자들이었다. 이민 집단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독일인들은 금주나 음주절제의 전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다른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은 다소 뜸을 들였지만 마침내 1917년에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후에 참전했고 곡물 보급량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에 따라 증류주 제조를 금지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설상가상으로 여성이 참정권을 얻을 터였다.


여성 참정권 시대까지 코앞으로 닥친 가운데 상황은 종료되었다. 미국 여성 대다수, 미국 남성 대다수, ASL, 게다가 자기 자리를 보존하고 싶은 상원 의원 전부가 그 결과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수정헌법 18조를 찬성했다. 흔히 금주법으로도 일컫는 수정헌법 18조는 유일하게 자유를 제한하고, 유일하게 폐지된 수정헌법으로서 실제로는 금지 대상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도 않은 채 ‘만취를 유발하는’ 음료를 법으로 금지한다고만 했다.


맥주 양조업자들은 수정헌법 18조의 통과를 꽤 느긋하게 받아들였다. 포도주 양조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시는 금주주의자들도 그랬다. 금주법이 알코올보다는 만취, 살룬, 폭력을 금하는 법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위스키 금지법이었다. 그러나 금주법은 수정헌법뿐 아니라 그다음에 나와 수정헌법에 언급된 음료의 정의를 명시한 볼스테드법olstead Act 으로 이루어졌다. 볼스테드법은 0.5퍼센트가 넘는 알코올을 함유한 술을 ‘만취를 유발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주류금지

볼스테드법은 절반의 효력을 발휘했다. 금주법 시대를 둘러싼 가장 큰 거짓말은 알코올 소비가 실제로 증가했다는 주장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법적인 알코올 소비 기록은 1920년에 중단되다가 1933년 다시 시작되었는데 그때는 알코올 소비량이 이미 절반 남짓 감소해 있었다.


금주운동이 싹트고 최초의 지지자들을 배출한 미국 중서부 소도시에서 살룬은 문을 닫았다. 소도시에는 경찰로부터 몸을 숨기거나 스피크이지를 세울 만한 뒷골목도 충분치 않았다. 알코올 반입은 가능했고 실제로도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산간벽지에 밀주Moonshine 증류기를 설치했고 주류 밀매업자들이 간간히 술을 배달해주었다. 그러나 사실상 살룬은 문을 닫았고 그와 더불어 특유의 행동 패턴도 사라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살룬의 폐쇄를 기점으로 짜릿하기로 악명 높던 옛 서부는 지루하기로 악명 높은 중서부로 바뀌었다.


금주법이 폐지된 까닭은 무엇인가?

금주법이 폐지된 까닭은 사람들이 원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9년 대공황은 미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고 그때부터 미국은 빈곤한 사람들은 대량으로 고용하는 산업을 금지하는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금주법은 이미 살룬 퇴출이라는 임무를 완수한 터였다.


금주법 폐지로 스피크이지speakeasy (겉보기에는 술집 티가 나지 않는 비밀 술집)는 합법화되었다. 포도주를 판매하는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여객선 사업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살룬이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금주법은 성공한 법이었다.


마지막으로 금주법이 완전히 폐지된 때는 1933년이 아니었다. 미국의 여러 주가 계속해서 술을 금지했다. 금주법은 미시시피가 마침내 금지 조치를 폐지한 1966년에야 끝장났다. 물론 아직도 술을 금지하는 카운티가 있기 때문에 금주법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주장도 어쩌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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