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 4주차

BOOK SUMMARY
 인문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저자 허연
출판 생각정거장
출간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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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고독이라는 내면

은둔 속에 살다간 ‘호밀밭의 파수꾼’

“아니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어?”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샐린저는 1965년 이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 머물다가 떠났다.


지금도 미국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되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의 결벽증은 유별났다. 1951년 <호밀밭의 파수꾼>이 처음 나왔을 때 그는 자기 사진이 뒤표지에 들어 있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결국 출판사가 사과를 하고 재쇄과정에서 사진은 빠졌다. 샐린저는 자기 작품이 다른 논문이나 책에 거론되는 것도 싫어했다.


1919년 뉴욕에서 유대교도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32년 성적 불량으로 중학교에서 퇴학당한다. 샐린저는 1942년부터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해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뉴요커>에 발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51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 사건이 오히려 샐린저를 은둔의 감옥에 가두는 계기가 된다. 샐린저는 유명인이 아닌 조용한 파수꾼으로 살고 싶어 했다.


16세 주인공 홀든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방황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은 샐린저 자신이다. 예민하고 기이한 인물이었던 샐린저는 소설을 통해 세속적이고 위선적인 물질문명을 비판했다. 그는 미국 소설 사상 처음으로 ‘fuck you’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없었다면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웃사이더 개념 설계한 영국 문단의 이단아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은 처음엔 상처를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서야 그 상처를 꺼내 맞대면했다. 오닐은 활발하게 활동하던 젊은 시절 자신의 가족사를 작품에 반영하지 않았다. 오닐이 자신의 상처와 본격적인 맞대면을 시도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죽기 직전 슬픈 가족사를 그대로 드러낸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쓰기 시작한다. 오닐은 “오랫동안 묵은 내 피와 눈물로 이 작품을 썼다”고 고백했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도 “내가 죽은 후 25년이 되기 전에는 책으로 펴내거나 무대에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인에게 당부한다. 오닐의 부탁과 달리 부인은 그가 죽은 지 2년 만에 작품을 공개했고, 오닐의 가족사는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희대의 명작에 실려 온 세상에 공개됐다.


작품은 어느 여름날 하루 동안 벌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다. 집안을 돌보지 않는 늙은 연극배우 아버지 타이론,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값싼 방편으로 마약에 손을 댔다가 중독자가 되어 버린 어머니 메리, 어머니의 비극을 보고 자라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큰 아들 제이미,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 폐결핵에 걸린 에드먼드가 주인공이다.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를 탓하며 분노하고, 다시 허탈해지기를 하룻밤 동안 몇 차례 반복한다. 가장 밀접했기 때문에 가장 저주스러운 가족들, 그들은 원망에 지쳐 빨리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제목이 ‘밤으로의 긴 여로’가 아닐까.


오늘의 가족사는 등장인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작품과 똑같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였지만 가족사의 비극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멀리 떨어진 일들을 하게 만들지. 우리는 운명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 <밤으로의 긴 여로>에 나오는 어머니 메리의 대사다. 지나친 운명론자였지만 오닐은 나중에서야 그렇게 살았던 생을 후회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사는 아니지만 오닐은 이런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행복은 수줍은 사람을 싫어한다.” 행복하기를 주저하는 사람. 행복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닐이 한 말이라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숨지 않은 감정의 고귀함

욕망에 충실했던 신의 어릿광대

“매일매일 인간은 가장 고귀한 충동들을 도살한다. 우리 안에 대가가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어린 싹을 밟아 죽인다. 우리는 모두 왕, 시인, 뮤지션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를 열고,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평소 이런 말을 하고 다닌 헨리 밀러는 문제적 남자다. 그는 충동을 억누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규칙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었고, 마치 여행가방 싸듯 여덟 번이나 결혼했다. 온갖 직업에 종사하면서 미국을 방랑하던 그는 마흔 살 무렵 무일푼으로 유럽행 배를 탔다.


훗날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으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사람들은 그의 작품보다 인생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절정은 그가 76세이던 1967년 46세 연하의 일본 배우 도쿠다 호키와 결혼을 발표했을 때였다. 그에게 위대한 문호라는 수사보다는 ‘욕망대로 하는 유명한 노인네’라는 수사가 붙어 다녔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내킨 대로 사는 게 과연 쉬운 삶이었을까? 헨리 밀러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어쩌면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규범대로 사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와 위험성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헨리 밀러의 작품 <신의 광대 어거스트>를 우연히 읽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헨리 밀러가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이유, 그 단서를 발견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신이 광대’로 살고 싶어 했다. 밀러의 바람대로 신은 바이러스가 숙주를 이용하듯 그에게 재능을 심어 주고 그를 숙주로 활용했다. 헨리 밀러가 뿜어져 나오는 욕망에 솔직했던 것은 심어 놓은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을까.


헨리 밀러는 자신을 ‘신의 광대’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이 어떤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 그가 그렇게 산 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이나 스포츠는 결국 타고난 놈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타고난 놈들을 헨리 밀러 식으로 말하면 결국 신의 어릿광대가 아닐까.


170년 전 유럽을 흔든 사랑학개론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아주 늙어 버렸다.”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의 주인공 블라디미르의 한탄 섞인 고백이다. 첫사랑에 빠졌을 당시 블라디미르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첫사랑은 한 남자를 어른으로 만든다.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이웃에 사는 가난한 공작부인의 딸인 스물한 살의 지나이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의 눈에 들기 위해 4m 높이의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등 훌륭한 남자로 보이기 위한 온갖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에게 따로 애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흥분한 블라디미르는 늦은 시간에 애인과 만나는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 칼을 가슴에 품고 현장에 잠입한다. 그리고 얼마 후 블라디미르는 평생 잊지 못할 상황을 목격한다. 자신이 그토록 저주했던 지나이다의 연인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가장 남자다운 남자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지나이다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블라디미르에게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준다. 그날로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난다.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 자신이 어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아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투르게네프의 경험담이다. 투르게네프는 스스로 이 작품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첫사랑>은 170년 전에 쓰여진 <사랑학개론>의 원전 같은 작품이다. 소설은 아버지의 불륜이나 정숙하지 못한 지나이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소설이 중심을 두는 것은 한 소년의 성장사다. 한 소년이 어떻게 이성에 대한 환상에 빠지고, 어떻게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는지를 정갈한 문체로 그린다. 상남자로 살았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라고 쓰여 있었다.  



유한한 시대와 무한한 나

낯설고 강렬한 문장, 작가들에게 존경 받는 작가

여름방학 어느 날 저녁, 우연히 사회과부도를 펼쳐보고 있었다. 시선이 서해안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비인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참 예쁜 이름이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세 번인가 갈아타고 비인면에 도착했다. 비인은 내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관광객 하나 없는 쇠락한 해변이었다. 낡은 표지판에는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해수욕장이었으나 지금은 폐장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닷가에 걸터앉아 노을이 질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묘한 느낌이 나를 감싸 안았다. 물론 지금 비인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있겠지만 30년 전 비인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W.G. 제발트의 책 <토성의 고리>를 읽으며 자꾸만 비인 여행의 기억이 또렷이 다가왔다.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 제발트는 어느 날 문득 영국 동남부로 여행을 떠난다. 내면의 공허 때문에 별 목적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쇠락한 한 시대를 만난다. 파괴된 숲, 버려진 청어 가공 공장, 낡은 저택, 몰락한 도시, 문명의 흐름에서 비켜난 사람들….


그가 왜 쇠락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책의 제목을 ‘토성의 고리saturns ring라고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토성이 생성 될 무렵 부서져 나간 먼지와 얼음이 궤도를 떠나지 못한 채 레코드판 모양으로 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토성의 고리다. 생성에 기여했으나 이제는 부서져 버린 것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잔해 때문에 토성은 가장 아름다운 행성이 될 수 있었다. 잔해들이 토성의 미학을 완성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결과들을 볼 때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이 높이에서 보면 주택과 공장은 보이지만 인간은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끔찍하리만큼 분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폐허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존재에 관한 묵직한 질문과 장엄한 가르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현대철학에 던져진 커다란 바위 같은 책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매우 어려운 책이다. 독일인들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독일어판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는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한다. 요즘 부쩍 하이데거 생각이 난다. 존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에 빠졌다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책에서 ‘존재’에도 ‘급級’이 있다는 깨우침을 던진다.


그저 그런 존재자들은 존재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비본래적uneigentlich 삶을 산다. 쉽게 말해 내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본래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독일 남부에서 태어난 27세의 소장학자 하이데거는 1차대전이 끝난 직후 불안과 군중심리가 횡행하는 유럽대륙을 보면서 “일상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여기서 ‘일상’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닌 채 사회나 타인이 시키는 대로 사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존재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독법이 있겠지만 이 짧은 글에서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그 가능성을 읽으면 된다. 죽음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죽음일까? 죽음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대체 할 수 없는 유일하고 구체적인 극적인 상황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은 불확실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회피한다. 이 때문에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용기 있게 직면하면서 자신의 본래 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이 실존을 찾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즉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대한 경험을 먼저 취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책임감 있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앞서 간다는 것

‘한’과 맞바꾼 한국문학의 대서사시

“무척 쌀쌀맞으시다던데. 질문 조심해야 할 거야.” 1990년대 초반 소설가 박경리를 인터뷰하러 갈 때 문단과 언론계 동료들이 해 준 말이었다.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결국 승낙하던 선생의 목소리에는 표현하기 힘든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박경리의 소설은 거대한 항거였다. 한 불운한 시대에 대한, 물신주의에 대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피맺힌 거사였다.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가 버리자 박경리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향한 불신과 증오를 배운다.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하지만 전쟁이 그녀의 생을 할퀴고 지나간다.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세 살짜리 아들마저 죽는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 위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친정어머니와 어린 딸, 그리고 자신이었다. 그 막막한 상황에서 칼을 드는 심정으로 펜을 든다. 그것이 작가 박경리의 시작이었다.


소설가가 된 이후에도 선생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선생이 처음 소설을 들고 문단에 나왔을 때 가해진 남성들의 폭력은 유치했다. 그들은 박경리의 글보다 곱상하게 생긴 전쟁미망인이 등장했다는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후 선생은 문단에 발길을 끊었다.


문학적 지명도를 얻은 이후에도 생은 순탄치 않았다. 외동딸인 김영애가 당시 유신 정권의 공적, 시인 김지하와 결혼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선생은 손자를 키우며 사위 옥바라지까지 한다. 이 무렵 탄생한 작품이 바로 대하소설 <토지>다. 한이 하도 많아 웬만한 작은 칼이 아닌 큰 칼로 세상을 일도양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최참판댁 4대에 걸친 가족사와 한 마을의 집단적 운명, 동아시아 역사가 담긴 대작 <토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한 영어의 아버지

‘곤경에 처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표현 ‘in a pickle’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셰익스피어다, 하지만 이 말은 셰익스피어가 직접 만든 표현이 아니었다. 같은 의미의 네덜란드 속담 ‘in de pekel zitten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같은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영어는 전형적인 혼혈 언어다.


1066년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이후 1399년 리처드 2세가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333년 동안 영국의 왕은 모두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학계나 종교계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지금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통일된 현대 영어를 최초로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71년에 걸쳐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편찬한 수천 명의 참여자다. 더 좁혀 말하면 영어를 만든 일등공신은 최장수 편집장으로 사전 작업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제임스 머리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1857년 그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편찬이 시작됐다. 하지만 작업은 20여 년 동안 여러 어려움 속에 지지부진한 상태로 있게 됐다. 이때 영국문헌학회장이었던 머리가 3대 편집장이 된다. 이후 30여 년 동안 머리는 1500명이 넘는 작업자를 통솔해 사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총 41만개 어휘와 180만개 예문이 담긴 사전의 초판본은 그의 작품이었다.


머리는 독특한 집필 방식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영어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역사적 원리와 예문을 기초로 어휘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한 단어의 세세한 의미와 철자, 발음이 수세기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했다. 그리고 주관성을 배제한 채 철저히 예문과 용례로 단어의 뜻을 정리해 나갔다. 학자뿐 아니라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보탰다.


자원봉사자 중 가장 많은 어휘와 예문을 보내온 사람은 W.C 마이너였다. 1만여 개가 넘는 단어와 예문을 보내온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된 미국 출신의 살인범이었다. 예일대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정신병에 걸려 살인을 하고 수용소에 감금된 사나이였다. 훗날 호사가들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머리와 마이너라는 두 광인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새로운 지성을 위하여

인터넷, 달 착륙 예언한 공상과학 소설의 지존

지금은 한국에서 절판됐지만 쥘 베른의 <20세기 파리>는 놀라운 책이다. 베른이 1863년에 집필한 이 소설은 쓰인 당시로부터 100년 후인 1963년 파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베른은 소설에서 20세기 중반 도시의 모습을 기막히게 예언해낸다. 텔레비전, 에어컨, 유리 고층 빌딩, 엘리베이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국제금융시스템까지 예언한다. 모두 지금 현실이 된 것들이다. 베른은 전무후무한 공상과학 작가였다. 그의 상상력은 100년 이상 앞섰다. 그가 써낸 건 한 편의 소설이었지만 그의 예언은 과학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베른은 1828년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낭트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큰 항구도시였다. 그는 낭트 항구를 가득 채운 배와 신기한 물건들, 선원들의 모험담을 보고 들으며 성장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꿈속에서 세계를 여행하면 100년 후 세상을 그려냈다.


베른은 소설 <지구 속 여행>에 이런 구절을 써넣는다. “과학은 오류 투성이지만, 그런 잘못은 종종 저지르는 게 좋아.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우리는 한 걸음씩 진리를 향해 나갈 수 있으니까.” 베른의 예언 중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그는 <20세기 파리>에서 문학, 즉 시時가 멸종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파리가 비인간적인 기계도시로 바뀌면서 시인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해지는 것’이다

18세기 중반 사진술이 발명되고 일반화되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 화가들은 “우리는 이제 망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사진은 사진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풍부하게 살아남았다. 20세기 중반 가정용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가장 긴장한 사람들은 미국의 영화산업 종사자들이었다. 안방에서 즐길 수 있으면 굳이 영화관까지 찾아오겠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이 역시 기우였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가장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정리한 사람은 스티븐 제이 굴드다. 세계적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굴드는 평생을 바쳐 ‘진화 = 진보’라는 잘못된 등식과 싸웠다. 그는 “다윈이 말한 진화evolution는 진보progress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못 막았다. 진화론에 대한 오해는 하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이라는 용어가 퍼지면서 시작됐다. 적자생존 이론은 호모 사피엔스를 진화의 정점에 있는 1등 생명체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같은 사피엔스 내에서도 ‘백인 우월’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다윈도 진화론을 쓰면서 고등higher이나 하등lower 같은 단어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진화론이 가져올 잘못된 파장을 경계했다.


1941년 뉴욕에서 태어난 굴드는 안티오크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2001년 작고할 때까지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과학자들의 전국 조직인 ‘민중을 위한 과학’에 참여하면서 강단과학과 전쟁을 시작한다. “사실상 우리 서양인들은 스스로를 지구와 생물을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이같이 오만하고 부정한 사상은 참된 다윈 정신이 아니다.”굴드의 말이 맞다. 진화는 우월해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정해진 환경 속에서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려는 생명체들의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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