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 1주차

BOOK SUMMARY
 인문 

땅의 역사 2

저자 박종인
출판 상상출판
출간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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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2


여자, 그녀들-사람이었으되 사람 취급 받지 못하였으니…

나는 제주의 신(神), 여자이니라: 바람 부는 제주도와 강한 그녀, 제주 여자

전복 공물과 인구 급감

조선 시대 지방에서 중앙 정부에 바치는 세금에 공물이 있었다. 왕실에서 필요한 현물을 그 지역 특산물로 조달받는 제도였다. 산에서는 짐승 가죽, 바다에서는 해산물을 받았다.(1469년 6월 29일 『예종실록』)


전복을 잡는 사람을 포작이라고 한다. 원래 포작은 남자 일이었다. 제주 여자는 남편과 함께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걷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1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말치기보다 10배나 된다.’(「제주목사 이형상의 장계」, 1702년)


목사 이형상의 보고서가 이어진다. ‘포민이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다. 대대로 살아온 뿌리가 박혀 꼼짝할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흩어져 달아났다.’ 달아날 수 있는 자는 모두 달아났다는 뜻이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이다. 남자들은 공물과 군역을 피해 육지로 달아났다.


가뜩이나 남자는 바다가 집어삼켜 씨가 마르던 섬이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고래 밥이라 했고 딸이 태어나면 효녀라고 했다. 그런데 그놈의 전복에 높은 자들이 환장하면서, 어느덧 섬에는 여자들만 남게 되었다. 바람 많고 돌 많은 섬 제주에 여자가 많게 된 근본 이유다. 바로, 전복 때문이다.


출륙금지령과 여자

문제는 가혹한 수탈이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보는 눈은 엉뚱했다. 전복을 비롯해 공물이 줄어들자, 왕실에서는 아예 제주에 육지 통행을 금지시켜버린다. ‘비국이 도민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1629년 8월 13일 『인조실록』) 정묘호란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지만, 왕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주민은 백성이 아니라 그저 공물 생산 혹은 채집인이었다. 그들은 자유를 박탈당했다. 남자들은 떠나고, 땅 살림과 바다 살림은 여자가 맡게 되었다. 아주 훗날 1946년 4.3 사건으로 남자들이 죄다 죽고서 제주는 더욱더 강한 여자들 땅이 되었다.


고단하고 강한 제주 여자

출륙금지령 73년 뒤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그때 ‘여자 역할이 매우 무겁다’라고 했다. ‘미역, 전복, 물 떠오는 일, 곡식 장만하는 일, 땔감 일 등 무릇 모든 힘든 일은 전부 여자가 한다.’(『남환박물』, 1702년) 1710년 제주에 유배 왔던 김춘택에게 한 해녀가 이리 말했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급히 죽거나 얼어 죽거나 돌과 벌레 같은 동물 때문에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시험 삼아 제 얼굴을 살펴보십시오.’(『북헌거사집』, 1710년) ‘눈이 크게 얼어도 관리들이 전복 캐오기를 독려하니 회초리로써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이 아닌가?’(실학자 위백규, 『금당도선유기』, 1791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제주 여자는 땅에서 일했고 바다에서 일했다. 인구가 급감하고 남자가 사라져버린 섬나라에서, 여자는 스스로 강해야 살 수 있었다. 결국 1800년, 정조는 전복 진상을 전면 금지했다.


그녀가 잠든 곳, 원수의 무덤에서 40리 언덕: 봉선사 부도밭의 비밀과 남양주 사릉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수양대군에게 시집갈 때 윤씨는 열한 살 소녀였다. 1453년 10월 10일 남편이 졸개들을 이끌고 김종서 집을 급습할 때 그녀는 머뭇대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1468년 세조가 죽었다. 정희왕후가 대신 권력을 쥐었다. 열아홉 살에 즉위한 둘째 아들 예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했다. 아들이 요절하자 바로 그날 열세 살짜리 손자 성종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7년 동안 섭정을 했다. 그녀가 1483년 죽자 남편이 잠든 광릉에 미리 마련된 한쪽 언덕에 묻혔다.


또 다른 그녀의 무덤, 사릉(思陵)

윤사로라는 자가 있었다. 단종 즉위 때부터 왕릉을 지키는 수릉관에 임명돼 계절마다 단종으로부터 옷을 하사받던 자였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죽던 바로 그날 윤사로가 이렇게 주장했다. “(역신들의)딸들은 공신에게 주어야 한다. 나는 송현수의 딸을 받기를 원한다.”(1457년 10월 24일 『세조실록』)


윤사로가 탐한 송현수의 딸이 바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다. 사관이 이렇게 썼다. “성질이 잘고 남의 재물을 빼앗는 자였다.” 다른 여자의 남편에 의해 자기 남편을 잃은 여자, 정순왕후 송씨는 광릉에서 15km 거리 언덕에 묻혀 있다. 무덤 이름은 사릉이다.


왕후에서 노비로 추락한 송씨는 양반집 출가 여인들이 살던 서울 동대문 정업원에 얹혀살았다. 왕실에서 주는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고 동냥질과 염색질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 염치는 있었던 세조는 노비라도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명했다. 그녀가 울면 동네 아낙들이 같이 울었다. 아낙들은 금남의 야채 시장을 열어 송씨에게 몰래 먹을 것을 조달했다.


왕과는 불과 2년 함께 살았지만, 왕후는 모질고 파란만장하고 오래 살았다. 원수 세조가 죽고 시사촌인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 죽음까지 지켜보았다. 세조 앞잡이로 나섰던 모사꾼 한명회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당하는 꼴도 보았다. 그리고 중종 11년(1516년) 영월에 있던 남편 묘에 봉분이 세워지고 제사가 치러졌다. 남편이 죽고 59년 만이었다. 그 모든 역사적 풍경을 낱낱이 지켜보고서 5년 뒤 그녀가 죽었다. 여든한 살이었다.


자식 없이 죽은 그녀를 위해 단종의 누나인 경혜옹주 시댁인 해주 정씨 가문이 자기네 선산에 그녀를 묻었다.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녀 또한 복위됐다.


유관순의 혼은 어디에 쉬고 있을까: 망우리 집단 무연고 분묘와 유관순

망우리 무연고 분묘 합장비

서울 중랑구 망우리에 있는 묘지공원 이름은 망우리공원이다. 근심을 잊는 공원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망우리공동묘지라 부른다.


입구를 지나 왼쪽 김해 김씨 묘 뒤편 오솔길을 가면 숲속에 큰 비석이 나온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비석 세운 날짜는 소화 11년 12월이다. 1936년 겨울이다.


1936년 10월 10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날 오전 11시 경성부윤과 경성부 직원들이 ‘장엄한’ 위령제를 진행한다고 보도했다. 이태원에 있던 공동묘지에서 ‘형적이 없고 연고자가 전혀 없어 보이는 무덤을 합장해’ 옮겼다는 것이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태원공동묘지에 있던 무덤은 모두 4만 2000기가 넘고 3만여 기는 무연고였다.


유관순과 이태원묘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대한제국 한성은 경기도 경성부로 변했다. 제국 수도에서 경기도청 소재지로 격하됐다. 1919년 3월 1일 전 조선인이 궐기했다. 서울 종로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기획했다. 한 달 뒤인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천안 주민들이 궐기했다. 유관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었다. 유관순은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조선인 헌병보조원 정춘영이 유관순을 직접 체포하고 고문했다.(1949년 8월 9일 『동방신문』)


유관순이 체포되던 그날, 용산에서는 조선군 20사단 사령부가 문을 열었다. 조선주차군은 이름 자체를 조선군으로 바꿨다. 이태원묘지 아래로 쫓겨간 둔지미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유골들을 골라내며 집을 지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결혼을 축하하는 사면령이 떨어졌다.(『조선총독부 관보』) 3년 형이 확정된 유관순은 출소 날짜가 1922년 3월 말에서 1920년 9월 말로 당겨졌다. 친구들은 십시일반 추렴해 옷을 맞추고 머리핀과 구두를 사서 환영식을 준비했다. 방광이 파열되고 곳곳이 골절된 유관순은 출소 이틀을 남기고, 죽었다. 친구들은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 앞에서 통곡했다.”(2004년 유관순 기숙사 동기 故 보각 스님 회고) 그 유관순이 묻힌 곳이 바로 둔지미 사람들 머리 위로 해가 뜨던 이태원공동묘지다.


경성 대개발과 백골 협잡

경성 인구는 급증했다. 성저십리 혹은 사산금표 따위 정책과 구분은 실종됐다. 무질서한 개발이 진행됐다. 총독부는 경성 확장을 가로막는 성곽을 철거하고 동서남북으로 경성을 확대했다. 홍제내리, 수철리, 신사리, 미아리, 이태원에 있는 공동묘지도 개발 대상이 됐다. 1933년 9월 총독부는 뚝섬 면목리와 양주군 망우리, 동구릉면 교문리 공동묘지 부지를 고시했다.


이 가운데 문제는 이태원공동묘지였다. 5개 공동묘지 가운데 가장 크고, 옆에는 군사령부가 있는 요지였다. 이태원 야산에는 더 이상 묘를 쓸 자리가 없었다. 1931년 3월 이후 경성부는 더 이상의 매장을 금지했다.(1931년 3월 24일 『조선일보』) 기존 묘들도 모두 망우리로 이장하기로 했다.


이 죽은 자들을 대상으로 온갖 협잡이 난무했다. ‘백골 협잡’이라 불리는 사기극이 대표적이고 절대다수였다. 무연고 분묘를 자기 조상 묘라고 신고하고 이장 비용을 받아먹는 사기꾼들이 널렸다. ‘북망산 해골을 협잡해 먹은 부 직원’(1936년 6월 12일 『조선일보』). 1936년 내내 협잡꾼 준동 기사가 신문을 채웠다.


망우리와 유관순

결국 1937년 이태원공동묘지는 망우리로 이전이 완료됐다. 무연고 유골은 모두 화장돼 망우리로 합장됐다. 이태원 언덕은 택지로 개발됐다. 땅을 파면 끝없이 해골이 나왔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끝나고 이태원에 사람들이 다시 정착했을 때도 해골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1993년 망우리 사람들은 공동묘지 초입 숲속에 쓸쓸히 서 있는 무연고 합장 비석과 봉분을 정비했다.


우리 모두의 누나 유관순의 영혼은 어디에 쉬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고향 천안에서는 그녀 영혼을 찾을 방도가 없어, 결국 그녀를 부르는 초혼제를 지내고 가묘를 만들었다. 거기에 있을 것인가. 한 줌, 아니 티끌 하나라도 흔적이 남았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왕조 스캔들-그들도 욕망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모두 사라지고 없더라: 세 왕조 흥망사가 있는 삼척

사라진 고대 국가, 창해삼국

고구려가 점령한 강릉 땅 예국, 이사부가 복속시킨 삼척 땅 실직국, 그리고 울진에 있던 파단국 세 나라를 창해삼국이라 한다. 신라는 이들 동해안 군장국가들을 죄다 복속시키고 결국 삼국을 통일했다.


1988년 1월 20일 울진 죽변항 옆 논에서 발견된 봉평리 신라비 내용에도 이 국가들이 나온다. 파단국으로 유배된 옛 실직국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고 곤장을 치고 소피를 뿌려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실직국 부흥파 가운데 진씨 가문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1990년 한 무리 일본인들이 비석을 보겠다고 울진을 찾았다. 이들은 자기네 성씨를 秦이라 쓰고 ‘하타’라고 읽었다. 비석에 있는 울진 옛 지명 ‘파단’ 또한 일어로 ‘하타’라 읽는다. 수수께끼의 고대 국가 실직국은 그렇게 다시 흔적을 찾았다.


백우금관 전설과 용비어천가

전주에 살던 무관 이안사는 한 상급 관료와 기생을 두고 다투다 식솔 170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다. 1253년 그 관료가 순찰사로 삼척에 온다는 말에 이안사는, ‘앉아 죽느니’하며 의주로, 함흥으로, 원나라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후손들은 다루가치라는 원나라 세습 관리로 살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웠다.


삼척에 정착한 지 한 해만에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가 죽었다. 이안사가 산중에 앉아서 묏자리를 고민하는데,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지나가며 이랬다. “소 백 마리 제사지내고 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네.” 가난한 이안사가 백(百) 마리 대신 흰(白) 소를, 황금 대신에 금빛 귀리 짚으로 관을 써서 장사를 지내니, 훗날 고손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백우금관 신화다. 훗날 「용비어천가」가사 ‘육룡이 나라샤’는 ‘목조’로 추증된 이안사부터 태종 이방원까지 여섯 왕을 칭송하는 말이다.


‘그 육룡이 바로 이곳 삼척에서 잉태됐다’라고 조선 왕실은 규정했다. 왕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개국을 하고 보니 이안사가 삼척을 떠난 지 139년이 흘렀으니 무덤 위치는 잊힌 지 오래였다. 먹고 살기 바쁘고 목숨 부지에 바쁜 날이 흘러갔다.


왕조 개창과 함께 무덤 수색 작업이 개시됐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세종 때 삼척에서 이양무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선조 때에 또 찾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후 도처에서 무덤을 찾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명예와 부귀가 예정된 일에는 사기꾼들이 들끓는 법이다. 수색 작업은 500년 넘게 계속됐다. 집요했다.


1899년 7월 11일 흐린 날,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이양무 무덤 수색 완료를 선언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날 고종은 무덤에 준경묘라 이름을 붙이고 비문을 직접 썼다. 태조 때부터 찾아 헤매던 시조 묘에 대한 추적과 왕실 정통성 확보 작업이 그날 완료됐다. 507년 만이다.


일 중독자 세종 사후 18년, 그 무덤을 옮기매: 세종대왕릉 영릉과 성주 왕자 태실의 비밀

‘종합병원’ 같았던 세종

세종이 마흔다섯 살인 1442년 겨울 창덕궁에서 대소동이 벌어졌다. ‘백관으로 하여금 창덕궁에서 거애하기를 무릇 3일 동안 하게 하였다.’(1442년 11월 18일 『세종실록』) ‘거애’는 장례 때 곡을 했다는 말이니, 모두가 세종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병으로 누웠다는 말이다.


1450년 2월 15일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생활하던 왕이 반역범과 강력범을 제외한 잡범들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틀 뒤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던’ 왕이 훙(왕의 죽음)하였다.(1450년 2월 17일 『세종실록』) 쉰세 살이었다. 세종이 죽고 조정에서는 “아버지 가까이 묻으라”는 유언에 따라 태종 무덤인 헌릉 옆에 왕비인 소헌왕후와 합장됐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안쪽이다.


이어지는 괴담과 천장(遷葬)

맏아들 문종이 왕위 계승 2년 만에 요절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1457년 9월 왕이 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장남 이장이 가위에 눌려 죽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두 달 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였다. 열여섯 살이었다. 수양은 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였다.


왕이 된 수양대군은 평생 피부병을 앓다가 쉰한 살에 죽었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가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아들도 곧 죽었다. 예종도 열아홉 살에 요절했다.


소름 끼치는 변고의 원인으로 사람들은 세종 묏자리를 꼽았다. 흉지라는 것이다. 결국 예종 즉위년 이장이 결정됐다. 그리고 1급 지관들이 전국을 뒤져 찾아낸 땅이 지금 세종릉이 있는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였다.


최고의 지관인 관상감정 안효례가 뒤지고 또 뒤져 제왕의 땅을 찾아내고 보니, 거기에 목은 이색의 후손이자 세조 반정을 도운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역시 공신인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묘가 있지 않은가. 실록은 두 가문의 후손에게 지극 정성으로 사례를 하고 세종을 천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록에 따르면 안효례가 찍은 자리는 이계전의 묘였고, 이인손의 묘는 그 옆이었다.


이인손 문중에는 이런 말도 전한다. ‘이인손이 후손에게 일렀다. 내가 죽으면 여기 묻되, 묘 앞 개울에 다리를 놓지 말고 재실이나 사당 따위 건물도 짓지 말라고. 그런데 명당 덕에 가문이 번성하자 후손들이 큼직한 재실을 지어놓으니, 훗날 소낙비를 만난 지관 안효례가 비를 피하러 돌다리 건너 들어간 건물이 그 재실이요 거기서 본 언덕이 천하명당이었다.’


천장 직후 예종이 요절하고 성종이 즉위했다. 성종은 16남 12녀를 낳았다. 훗날 풍수술사 사이에서 영릉 천장으로 인해 조선 왕조 수명이 100년 늘어났다는 말이 돌았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인손과 이계전의 묘는 각각 여주 땅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한산 이씨 이계전의 묘는 연산군 시대 폐비 윤씨 사건에 후손이 연루돼 봉분 파괴라는 횡액을 겪기도 했다. 세종은 죽어서 본의 아니게 두 이씨 가문에 민폐를 끼친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민초, 우리들-그래도 사람이 살던 세상

‘당신들의 천국’에서 마주친 서글픈 역사: 소록도 이야기

소록도 1917~2018

소록도는 하늘에서 보면 아기 사슴 밤비처럼 생겼다. 하늘 날 방법이 없던 옛 사람들이 이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섬 이름이 ‘아기 사슴 섬’ 소록도다 .1917년 5월 17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문을 열면서 사람들 편히 살던 사슴 섬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혜의원은 나병 환자 치료 및 수용 시설이다. 이름은 훗날 갱생원으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바뀌었다. 소록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까지 금단의 공간이었다.


세간이 한센병에 가지는 편견과 두려움에 특별한 목적 없이 사람들은 섬으로 드나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고많은 병 가운데 한센병은 하늘이 내린 벌, 천형이라고 했다. 2009년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건설됐다. 자혜의원이 생기고 92년, 근 100년 만이다. 지금 소록도에는 관광객이 넘쳐난다. 한센병에 대한 편견도 사라졌다. 그 사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섬에서 벌어졌다.


원장 조창원과 ‘우리들의 천국’

1961년 군의관인 육군 대령 조창원이 소록도에 14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서른여섯 살 먹은 이 젊은 원장은 병동과 직원 관사 사이 철조망을 없앴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벽돌 공장을 보란 듯이 폭파했다. 1963년 공원 한가운데에 대천사 미카엘이 창으로 한센균을 찌르고 있는 구라탑을 세웠다. 불임수술도 철폐했다. 축구부도 만들어 전국체전 예선에 출전했다. 전남 예선에서 우승했다. 모두 울었다.


그리고 대역사를 시작했다. 북쪽 무인도 오마도까지 주민 스스로 간척 공사를 해서 “우리들이 천국을 만들자”고 했다. 주민들은 붕대 감은 손으로 ‘구루마’에 돌을 싣고 바다를 메웠다. 인근 주민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문둥이와 몸 부대끼며 못 살겠다고 했다. 투석 작업이 85%가 이뤄진 무렵 결국 공사가 중단됐다. 투서가 난무하는 가운데 조창원은 마산으로 전근당했다. 1964년 벌어진 일이다.


“소록도 주민들이 혹사당한다”는 소문에 『조선일보』기자 이규태가 소록도에 잠입했다. 가보니 혹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살 땅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소록도 르포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잡지 『사상계』에도 실렸다. 제목은 ‘소록도의 반란’이었다. 바다 건너 장흥 진목마을에 사는 소설가 이청준이 그 글을 보았다. 이청준은 이규태를 만나고 원장 조창원을 만났다. 그리하여 나온 소설이 명작 「당신들의 천국」이다.


우리들의 천국, 소록도

진목마을 뒷산에 오르면 득량만 건너 소록도가 보인다. 2009년 그 풍경화 속에 다리 하나가 추가됐다. 소록대교다.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600m 남짓 떨어져있는 이 섬이 마침내 연결된 것이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거부하고 모두가 쉬쉬하던 그 섬으로 모두가 몰려드는 것이다. 주민들이 사는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공간이 개방돼 사람들을 맞는다.


그 600m를 건너 섬에 발을 내디디며 사람들은 놀란다. 바다와 하늘은 물론 소록도 주민들이 온몸으로 만들어놓은 공간이 아름답기가 그지없는 것이다. 수탄장 숲에서 시작한 산책로는 국립소록도병원 본관까지 이어진다. 감탄하던 관광객들은 곳곳에 서 있는 흔적들을 보며 침묵에 빠진다.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한하운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 ‘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니리’ 그리움과 감탄과 침묵이 끝없이 교차하는 섬나라 이야기였다.


황금광 시대: 30년대 골드러시와 친일파 박춘금

황금 광풍(狂風)과 정선 - 김정숙

1929년 미국 뉴욕 증시가 폭락했다. 세계는 경제 불황의 늪에 빠졌다. 돈값은 똥값이 됐고 금값은 치솟았다. 군수물자를 수입하던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 조선에 대대적인 금광 개발을 허가했다. 대풍작을 거둔 1930년, 조선 농민들은 팔 곳 없는 쌀을 버리고 금광으로 들어갔다. 이름하여 황금광 시대가 도래했다.


노다지만 캐내면 팔자를 고치니 신분 고하 직업 불문이었다. 좌익계 작가 팔봉 김기진,「봄봄」을 쓴 김유정, 풍자 작가 채만식과 학자 조병옥에 시인 모윤숙까지 광풍에 휩쓸려갔다. 가산을 탕진한 김유정은 「금 따는 콩밭」을 썼고 채만식은 「금의 열정」을 썼다. 김유정은 이렇게 썼다. “광부는 말이여, 빛날 광이 아니라 미칠 광에 광부, 광쟁이라니까.” 금광 주인들은 광부들 똥구멍까지 뒤집어가며 금 도둑을 감시했고 대낮에 신혼부부 손가락을 잘라간 금가락지 강도도 나왔다. 잡지 『삼천리』는 이렇게 보도했다. ‘금광 아니하는 사람을 미친놈으로 부르리만치 되었다.’(『삼천리』, 1934년 8월)


김정숙은 그 광풍을 제대로 탄 여자였다. 1896년 평북 평원에서 태어난 김정숙은 열다섯 살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금광꾼이었다. 금을 찾아 헤매는 남편을 따라 팔도를 헤매며 이리저리 땅속을 파내려갔다. 그러다 흘러 흘러 정선에 있는 천포광산으로 왔는데, 8년 만에 이곳에서 금맥이 터졌다. 1932년 일이다. 누구나 노다지 이야기를 하던 그 시절, 김정숙은 성공한 금광꾼으로 대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김정숙은 이 갈리게 고생한 금광을 팔아치우고 금광사에서 사라졌다. 매각 금액은 20만 원. 지금 돈으로 240억 원이다.


김정숙으로부터 천포광산을 매입한 회사는 소화광업이다. 총독부가 펴낸 『광구일람』에는 소화광업 사주 이름이 ‘朴春琴(박춘금)’이라 적혀 있다. 박-춘-금. 1949년 혁신출판사에서 펴낸 저자 미상 『민족 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는 박춘금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경남 1891년생. 동족 학살을 기도한 악귀.’


박춘금 이야기

박춘금은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경남 밀양 사람인 그는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가 주점 심부름꾼을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조선인 노동자 취업을 알선하고 통제하는 ‘상애회’를 운영했다. 출신이 불명확한 이기동이라는 다른 친일파와 함께였다. 모토는 ‘민족적 차별 관념 철폐와 일선 융화’였다.


박춘금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시체 더미를 청소하면서 일본인 눈에 들었다. 이후 그는 제대로 된 친일 행각을 벌여나갔다. 1924년에 『동아일보』가 반일 사상범 박멸을 주장한 박춘금을 맹비난했다. 박춘금은 『동아일보』사장 김성수와 편집국장 송진우를 명월관으로 불러 두드려 패고 감금했다. 1928년에는 농민 폭행 사건을 비판한 『조선일보』편집국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편집국장 한기악을 협박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이 명확하던 1945년 7월 24일 박춘금은 서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했다.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 동참을 격려하는 집회였다. 박춘금이 단상에 오를 때 대한애국청년단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다. 부민관 의거다. 박춘금은 8월 8일을 기해 전국 반일.항일 인사 30만 명을 처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일 뒤 해방이 되었다. 계획은 무산됐다. 박춘금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박춘금이 1963년 잠시 귀국했을 때 한다는 말이 “독립국이 된 조국에 돌아와 떳떳하다”였다. 1973년 박춘금이 죽었다. 유족이 몰래 고향 밀양에 묻었다. 1992년 그가 묻힌 밀양 무덤에 ‘일한문화협회’라는 단체가 송덕비를 세웠다. 2002년 밀양 시민들이 비석을 파괴했다. 2006년 무덤 위로 도로가 나고 무덤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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