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2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세상을 바꾼 위대한 탐험 50

저자 마크 스튜어드 외(역:박준형)
출판 예문아카이브
출간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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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위대한 탐험 50


위대한 걸음 : 아폴로 11호와 달 착륙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 위에서 첫발을 떼는 역사적인 순간은 지금까지 중 최대 규모의 탐험 프로젝트를 8년 동안 진행해 얻어낸 눈물겨운 결실이었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은 38만 4,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위험천만한 진공 공간을 나흘 동안 이동해 달에 도착했다. 총 240억 달러가 사용된 달 탐험 프로젝트는 비전시 상황에서 명실공히 가장 대규모이며, 가장 최고의 기술이 적용된 가장 창의적인 프로젝트였다.


아폴로, 우주를 날다

케네디 대통령은 “10년 이내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킨 다음 무사 귀환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담 프로그램으로 ‘아폴로’를 개발하기 위해 나사(NASA)에 기금을 할당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지구상 가장 똑똑한 과학자 수백 명이 로켓과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우주비행사를 궤도에 올려 달에 착륙시킨 다음, 다시 우주로 귀환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폴로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1967년 1월 27일에 발사 시험 중이던 아폴로 1호의 사령선에 불이 붙는 바람에 그 안에 타고 있던 우주비행사 버질 그리솜,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가 사망했다. 하지만 나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68년 12월 두 번째 유인 우주왕복선인 아폴로 8호가 발사에 성공했다. 아폴로 8호는 지구의 궤도를 떠나 달 궤도에 진입했다가 다시 지구에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두 번의 성공 후, 드디어 1969년 7월 16일에 아폴로 11호가 발사 준비를 완료했다.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

우주왕복선은 시속 4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비행했다. 2시간 30분 후, 우주왕복선이 지구 궤도에 진입했고, 또 다른 로켓 통이 연소하기 시작했다. 달에 도착할 때까지 이 새로운 연소 통이 연료를 공급할 예정이었다. 아폴로 11호는 사흘 동안 공기가 전혀 없는 우주를 날았다. 나흘째 되는 날에는 달 뒤로 사라졌고, 달 상공 100킬로미터 위의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서 다시 로켓에 불을 붙였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콜린스와 작별인사를 나눈 후 이글로 기어 올라갔다. 동료들이 달을 탐사하는 동안 콜린스는 달 궤도를 공전하는 콜롬비아에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하강을 시작하고 5분 남짓 흘렀을 때, 올드린이 컴퓨터에 고도를 계산하라는 명령어를 넣자 오류 메시지가 뜨는 바람에 모두가 공포에 휩싸였다. 엔지니어들이 냉철하게 분석을 시작했고, 컴퓨터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임무를 진행해도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몇 분 후,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경보가 울렸다. 암스트롱은 원래 이글이 착륙하기로 했던 분화구가 거대한 바위로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수동으로 이글을 조종해 더 낮은 곳에 착륙을 유도했는데, 이 때문에 더 많은 연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달에 선 인간

달 착륙선은 두 사람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부드럽게 착륙했다. 하지만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착륙한 뒤 4시간 동안이나 착륙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암스트롱은 이글 밖으로 나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고, 드디어 달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구를 떠난 지 109시간 42분만의 쾌거였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자신들의 모습을 지구로 전송하기 위해서 착륙 지점에서 약 9미터 떨어진 곳에 삼각대를 세우고 TV 카메라를 올렸다. 두 사람은 30분 동안 달 위를 유영한 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다음 2시간 반 동안은 암석 표본을 채취하고, 사진을 찍고, 실험 장비를 설치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표면에서 총 21시간 36분을 보냈다. 그중에는 7시간의 수면시간도 포함됐다. 이륙 엔진은 성공적으로 작동했고, 착륙 장비를 남긴 채 이륙했다. 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글은 달의 궤도에서 콜롬비아의 도킹에 성공했고, 세 사람은 재회했다. 콜롬비아는 다시 지구로 향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인류의 영웅이 된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가 지구로 무사 귀환했다.



신대륙의 발견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새로운 세상을 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바하마에 있는 섬이었고, 그때는 1492년이었다. 그다음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베네수엘라에 도착하면서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 됐다.


조난 희생자에서 뛰어난 항해사로

역사적 기록 중에서 콜럼버스의 존재는 1476년에 포르투갈 해안에서 난파된 배의 생존자로서 처음 확인됐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북쪽으로는 영국과 아이슬란드,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골드코스트, 엘미나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콜럼버스는 뛰어난 항해기술을 익힐 수 있었는데, 덕분에 이후의 항해에서 상당한 도움이 됐다.


여러 궁권을 거치다

콜럼버스는 1486년에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당시 스페인은 기독교 지배를 재정립한 그라나다 정복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은 서쪽 항해를 위해 배 3척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만약 콜럼버스가 땅을 발견하면 해군 제독과 집정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새로운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10퍼센트를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상인의 투자를 받아 배 3척을 사들였다. 콜럼버스의 일지에 따르면 1492년 8월 3일 아침에 출항했다. 배 3척은 일주일 후 핀타 호의 방향키를 수리하기 위해서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 콜럼버스가 이끄는 배들은 북서 무역풍을 이용해 드디어 미지의 서쪽을 향한 항해에 나섰다.


신대륙의 신호

10월 7일 일요일, 니냐 호에서 선원들이 깃발을 올리고 총을 발포했다. 육지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밤에는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고, 10월 12일 금요일 새벽 두 시에는 가까운 육지가 보였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동인도라고 확신했지만, 그곳의 이름을 산살바도르라고 지었다. 당시 그곳 원주민인 타이노인들이 과나하니라고 불렀던 그곳은 실은 지금의 바하마였다. 콜럼버스는 바하마에 내려 그곳 섬을 왕과 왕비의 땅으로 선언했다.


첫 번째 정착

1493년 1월 16일, 콜럼버스는 니냐 호를 타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배에는 납치한 타이노인이 함께 탔지만, 39명의 선원은 아이티에 남았다. 1493년 3월 15일에 드디어 팔로스로 돌아왔다. 콜럼버스는 바르셀로나에서 페르디난드 왕과 이자벨라 왕비에게 인질인 타이노인을 소개했고, 긴 항해를 통해 얻은 금과 이국적인 물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침묵의 세계 : 자크 쿠스토와 칼립소 호

1950년, 세계의 해양생물학계와 대중 과학, TV 다큐멘터리는 어떤 한 사람과 그의 탐험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 주인공은 바로 칼립소 호를 탔던 자크 쿠스토다. 쿠스토는 잠수부 몇 명과 ‘칼립소’라는 이름의 멋진 탐사선을 타고 지중해, 페르시아만, 홍해, 인도양의 해양생태계를 2년간 조사했다. 그는 직접 설계한 획기적인 해양카메라를 이용해 해저의 신비에 관해 25킬로미터에 달하는 필름을 촬영했다. 촬영된 내용은 <침묵의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로 탄생했다. 쿠스토의 다큐멘터리는 1956년 아카데미상과 칸 영화제 황금종료상을 수상했는데, 다큐멘터리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전쟁 중에 태어나다

1910년 프랑스의 서쪽 해안지방에서 태어난 쿠스토는 언제나 바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새로운 호흡 장비를 개발해 잠수를 시작했고, 4년 후에는 프랑스 해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로 해군 생활을 포기하게 됐고, 덕분에 바닷속을 탐험하는 시간은 더 늘어났다.


제2차 대전의 암울한 시기 동안 쿠스토는 독일이 점령한 파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엔지니어인 에밀 가냥을 알게 됐다. 가냥은 가스 발전기의 효율성을 높여서 전쟁 중이던 프랑스의 연료 부족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동 조절기를 만드는 데 사용한 물건이 바로 잠수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 쓰는 호흡 장치였다. 쿠스토는 이 물건을 보자마자 잠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압축된 산소 탱크가 붙은 새로운 장비는 잠수 시간을 이전보다 2배나 연장해 한 시간으로 늘려줄 수 있었다.


1943년, 쿠스초는 자신이 만든 혁신적인 장비를 이용해 실험적인 해저 영상을 만들었다. 덕분에 쿠스토는 프랑스 해군 산하의 해저연구단체를 이끌게 됐다. 연구팀은 프랑스 연안과 지중해의 지뢰를 없애는 한편, 잠수사들을 훈련하고 테스트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해저 탐사 임무 또한 맡았다.


칼립소 호 개발

1949년에 해군을 떠난 쿠스토는 다음 해 영국의 지뢰 탐사선인 칼립소를 과학적인 연구를 위한 배를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칼립소 호에는 헬리콥터에 사용되는 착륙패드와 잠수부를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서, 악천후 속에서 잠수부가 파도를 피할 수 있었다.


쿠스토가 1953년 당시 탐험에 대해 집필한 <침묵의 세계>는 책으로 출판돼 500만 부가 판매됐으며, 여러 세대를 아울러 많은 사람에게 바닷속 세상의 경이로움을 알렸다. 칼립소 호의 성공으로 쿠스토는 평생을 바다에 숨겨진 놀라운 세상을 탐험하고 기록하는 데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다. 그는 120편 이상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50권 이상의 책을 집필했다.


세상을 매료시킨 열정

쿠스토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과학 탐구자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자크 쿠스토의 해저 세계>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촬영하며, 세상에 바다의 놀라움을 소개했을 뿐 아니라 바다의 과학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쿠스토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었다. 당시 학계는 쿠스토가 과학적인 개념을 인기몰리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가 사용했던 방법이 다큐멘터리 제작과 방송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라싸로의 여행 : 히말라야를 가로지른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

서양에서 티베트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였다.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이 티베트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했고, 몇 안 되는 소수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짧은 기간 동안 종교 활동을 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티베트를 방문하려고 했던 소수의 여행자들은 그곳에 출입이 금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양의 유혹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은 19세기 말에 티베트에 관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유롭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10대 소녀로 자란 그녀는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남들과 다른 생각을 꿈꾸려 했다. 닐은 일기에 “나는 야생의 언덕, 거대한 초원, 접근하기 어려운 빙하를 꿈꾼다”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했고, 1900년 튀니지 오페라 하우스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절에는 프랑스인 엔지니어 필립 닐을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1904년에 결혼했다. 부부는 평생 가까운 사이로 지냈지만,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따로 살게 됐다. 닐은 1911년에 인도로 떠나 1925년까지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성자에게 배운 겸손함

닐은 1912년에 시킴의 한 불고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중에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닐은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서양 여성 중 하나였는데, 그와의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닐은 티베트어를 배우는 데 집중했고, 이후 공부는 더욱 진지해졌다.


젊은 수도사인 아푸르 용덴과도 친구가 됐는데, 나중에 그를 양아들로 입양하게 됐다. 1916년, 두 사람은 몰래 티베트의 시가체까지 들어가 라마를 만났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영국인들에게 발각돼 시킴과 인도에서 추방됐다. 티베트 근처의 칭하이 섬에 있는 컴범 수도원에서 3년을 지내는 등, 이후 닐은 오랜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 용덴과 라싸로 몰래 잠입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비밀스러운 순례

1923년 가을, 닐과 용덴은 중국 북서부 원난의 리장에 있는 프랑스 선교 단체에서 티베트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하인 2명과 함께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틀 만에 하인을 따돌리고, 변장한 상태로 티베트 입구인 도카르 고래를 지나 라싸로 향했다.


두 사람은 순례자로 변장했다. 용덴은 순교자로, 닐은 그의 어머니로 변장했다. 모자 간의 헌신적인 순례는 그곳에서 흔한 광경이었고, 가난한 순례자로 분장했기 때문에 다른 동행자가 있거나 돈을 가지고 여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닐은 티베트 옷과 모자를 썼을 뿐 아니라, 갈색 머리에 먹을 바르고 큰 귀걸이를 걸어 모습을 완전히 바꿨다.


닐은 라싸로의 여행에 자신의 여행을 기록했다. 기록에는 표범이 잠을 깨운 이야기, 겨울 동안의 극심한 추위와 눈보라, 권총을 쏘거나 불교 저주로 도척들을 쫓는 사연, 가면이 벗겨져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 적혀 있다.


금지된 나라로

1924년 2월, 두 사람은 4개월간의 도보여행 끝에 라싸에 무사히 도착했다. 닐은 이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날씨는 맑고 건조했으며 추웠다. 하늘은 밝게 빛났다. 떠오르는 장밋빛 햇볕 속에서 멀리 라마 통치자의 거대한 궁전인 포탈라가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웅장하고 인상적이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지붕은 날카롭게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튀어 올라갈 것처럼 보였다. 마치 성 전체가 불꽃으로 된 왕관을 쓴, 티베트의 영광과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라싸에서 두 달 동안 사원을 답사한 다음 포탈라를 방문했다. 새해를 기념하는 티베트의 축제와 행사도 즐길 수 있었다. 원래 닐은 조용히 그곳을 떠나려 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여행에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티베트 남부에 있는 영국 전초기지인 갼체로 향했다. 그리고 기꺼이 주민들이 기거하는 방갈로로 갔다. 인도로 돌아간 닐은 1925년 5월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후 프랑스 남부에 정착해 티베트 여행과 불고, 용덴의 도움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비밀의 도시 페트라 : 요한 부르크하르트가 찾은 우화 속 도시

고대 나바테아인은 지금의 요르단에 살았으며, 기원전 4세기에 처음 기록됐다. 로마가 중동을 정복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서기 106년에는 다른 사막 부족이 부상하면서 나바테아 문화는 희석되고 흡수됐다.


절벽을 깎아서 만든 도시

페트라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페트라는 중동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입구 쪽에 있는 사암 절벽의 복잡한 조각은 종교 건물, 회의실, 무역을 위한 건물, 정교한 무덤으로 이어졌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몰락과 함께 쇠락했다. 게다가 서기 4세기에 강한 지진이 발생해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마저 도시를 빠져나왔다. 이후 1,400년 동안 페트라는 베두인족과 가축이 오고 갈 때 잠깐씩 몸을 피하는 용도로 쓰는 유령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페트라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렸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고고학 보물 중 하나인 페트라가 부활하게 된 것은 어떤 야심에 찬 젊은 모험가가 이집트로 가는 길에 여행자에게 우연히 들은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망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1809년, 런던에 본부를 둔 아프리카 협회에서 일하던 스위스인 요한 부르크하르트는 카이로로 가던 중에 몰타에 들르게 됐다. 몰타에서 부르크하르트는 울리히 시첸 박사라는 독일 탐험가가 산속에 오래송안 숨겨진 도시를 찾기 위해 카이로에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 후 실종됐으며, 살해된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도시의 이름이 ‘페트라’였다.


부르크하르트는 시리아의 알레포 항구에서 숙소도 구하고, 위장할 신분도 얻었다. 그는 도시에서 영국 영사인 존 바커와 접촉했으며, 여행 동안에는 이브라힘 이븐 압달라라는 신분으로 변장했다. 그는 알레포에서 3년을 보내면서 남쪽 사막의 지도들을 연구하고 이슬람의 방식을 배우며 지역 관습을 익혔다. 알레포에 있는 동안 근처의 유적지에서 고대 상형문자를 기록하는 소규모 탐사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의 2년은 주로 앞으로의 안전을 위해서 투자했다. 그는 유목민 상인들과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에서 세 번이 짧은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그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역경에 굴하지 않다

그는 우연히 만난 베두인 여행객에게 카이로로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해달라고 설득했다. 베두인 여행객은 부르크하르트가 정말 시리아 상인인지 의심했지만, 폐허로 안내해주는 데 동의했다. 두 사람은 사막의 모매를 가로질러, 가파르고 메마른 협곡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들은 30분 동안 서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절벽이 갈라지면서 공간이 나타났고, 그곳에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장관이 펼쳐졌다. 그곳이 바로 페트라였다.


베두인 여행객의 의심

페트라 탐험은 쉽지 않았다. 베두인 여행객은 노골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신은 분면 고대 도시의 유물을 찾으려는 첩자가 분명해. 이곳에 있는 우리 보물들 중 동전 하나라도 가져간다면 당신은 큰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페트라는 지나치게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은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하루 동안 가능한 스케치와 메모를 많이 남겼고, 틈틈이 측정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그곳을 떠나 다시 카이로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탐험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으려고 했다. 나일강 아래 수단까지 2,400킬로미터를 여행했고, 거지 행세를 하며 메카와 메디나의 폐쇄된 송지에서 몇 주를 보냈다. 1813년에는 아부심벨에서 모래로 뒤덮인 람세스 2세의 사원을 발견하고 경이로운 유적을 더 많이 찾아냈다.



아마존강을 따라서 : 에드 스태포드의 아마존 오디세이

아마존강은 안데스 산맥에 있는 수원에서 대서양까지 6,400킬로미터나 된다. 또한 아마존강의 구불거리는 협곡은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힘든 지역을 따라 흐른다. 2008년, 에드 스태포드라는 전직 군인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현대에 들어 가장 위대하다고 손꼽을 수 있는 탐험에 착수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아마존강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걸었으며 놀라운 인내력을 보여줬다.


정글을 맛보다

스태포드는 탐험 초보자가 아니었다. 그는 영국 육군에서 4년간 복무했고, 대장의 위피까지 올랐으며, 아프가니스탄, 보르네오, 과테말라, 구야나를 경험하고 벨리즈 열대우림에서 관광단을 통솔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마존 탐험을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혼자라면 힘들 수 있겠지만, 다행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국 출신인 37세의 아웃도어 전문가 루크 콜리어가 바로 그의 동료였다.


두 사람의 목표는 페루 해안 마을 카마나에서 출발해, 페루 사막을 건너 안데스 고원에 올랐다가 아마존의 수원을 찾은 다음, 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아마존에서의 경험이 부족한 두 사람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21세기 최고의 탐험 프로젝트였다. 스태포드와 콜리어는 블로그에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올리기 위해 각자 디지털 장비를 갖췄다. 그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 제작진도 이들의 여행 일부에 동행할 계획이었다.


한 사람이 쓰러지고

불행하게도 콜리어의 여행은 일찍 끝나고 말았다. 여행 90일 만에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고, 콜리어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아마존 분지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스태포드는 그 즉시 블로그에 구인 광고를 올렸다. 두 사람의 힘을 합해도 쉽지 않은 모험이었는데, 스태포드 혼자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새로운 파트너

이때 그나마 다행한 일이 일어났다. 페루 산림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고, ‘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가디엘 산체스 리베라가 특히 까다로운 지역을 탐험할 때 합류하기로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정글에서의 삶에 재미를 느낀 그는 에드와 좋은 친구가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 전체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야생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

두 사람은 늘 식량이 부족했다. 두 사람은 거북이, 문어, 피라냐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었지만, 탐험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양을 보충받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위험천만한 상황은 페루와 브라질 국경 근처에서 총을 든 원주민을 만났을 때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족장과 형제를 가이드로 고용하겠다고 제안해 아사닌칸을 달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바다

두 사람은 2010년 8월 9일 마루다 근처 대서양에 도착했다. 스태포드는 860일 동안 도보로 9,5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21세기 기술 덕분이었다. 그가 이동하는 내내 위성 내비게이션 장치를 사용했고, 블로그에 여행 과정을 모두 기록했다. 현대 시대의 위대한 탐험가로 알려진 라눌프 파인즈는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서 최고의 탐험이다”라는 평가로 그의 정신을 훌륭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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