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2월 1주차

BOOK SUMMARY
 인문 

편지로 쓴 철학사 1: 현대편

저자 이수정
출판 에피파니
출간 2017.11
헤겔 이후 현재까지, 철학적 지성 100인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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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쓴 철학사 1: 현대편

독일로 부치는 철학편지 
쇼펜하우어에게 - 의지와 고통을 묻는다 
당신의 철학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철학이 한갓된 강단 철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삶의 진실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삶, 의지, 고통, 예술, 공감, 의지부정, 해탈 등과 같은 단어들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가 인간과 세계라는 철학의 고유한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경우, 피할 수 없는 특유의 인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들입니다. 지극히 구체적인 우리의 개인적 삶과 직접 맞닿아 있는 것, 당신의 철학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이 삶이라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객관적-체계적인 눈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조하는 학문적 사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 점은 이미 당신의 생존 중에 대중적인 평가를 받았던 《여록과 보론》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삶은 고통이다”, “이 세계는 그 어디에서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당신의 선언은, 부정하고 싶은,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쩔 수 없는 공감’이 거기 있었습니다. “고통은 적극적이고 행복은 소극적이다”라는 당신의 지적은 내 삶의 실제 과정을 통해 틀림없는 진리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그 원인을 이른바 ‘의지’로 진단합니다. 의지는 ‘자기 아닌 것, 즉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로 지향하는 끊임없는 분투의 노력’이라고 당신은 설명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현상의 전체 세계는 객관화된 의지이다. 의지란 그것의 성향에 따라 가지각색의 형태를 취하는, 투쟁하고 열망하는 힘이다.

대상들 속에 몰입하고 그들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앎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표상으로서의 그리고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의지를 알게 된다”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의지이고, 의지는 열망하는 힘이며, 우리는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당신이 말하는 의지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가득 차 있으며 그것이 곧 세계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물을 이 의지의 부단한 운동으로 이해하고, 모든 사물을 그 성질과 특성에 따라 참모습으로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듣고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너무나 그럴싸합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특히 그렇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이기에 당신은 그것을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감이 좀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엄연한 진실임을 쉽게 부인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바로 그 의지가 고통의 근원임을 당신은 지적하셨지요.

의지는 도처에서 저항에 부딪치며, 어렵게 만족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 또한 오래가지 않을뿐더러 끊임없이 다음을 지향하여 한계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철저하게 잔인한 고통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보이는 핵심 사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쇼펜하우어, 당신 자신이 고백하듯이 당신의 철학에서는 칸트와 플라톤과 우파니샤드의 흔적이 농후하게 발견됩니다(“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칸트의 주관주의와 맥이 닿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학자적인 역량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굳이 그런 전통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자신의 통찰만으로도 이제 사람들은 충분히 당신을 주목합니다. 이미 당신은 니체와 실존주의를 통해 역사적인 평가도 얻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부디 경쟁자 헤겔을 잊고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헤겔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현대철학의 세계에서 당신은 확고한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니, 그만하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니체에게 - 신의 죽음과 초인을 묻는다 
나는 아직도, 당신의 대표적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으며 그 힘에 넘치는 문장들이 마치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내 정신의 한쪽 기슭을 세차게 때리던 대학 시절의 그 독특한 느낌을 추억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문장들을 통해 전해오던, 거대한 권위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우리 인간들의 이 지상적 삶에 대한 전폭적인 긍정에 대해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종류의 매력은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보더라도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모든 가치의 뒤집어엎음’을 획책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덕을 ‘노예도덕’이나 ‘가축도덕’으로 규정하고, ‘힘에의 의지’에 근거한 ‘주인도덕’을 수립하고자 하는 엄청난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권위로 화한 여호와와 예수에 대한,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일대 반역이었습니다.

당신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만 보면 그것은 일단 ‘멋진’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최고의 권위인 ‘신’과 ‘신의 아들’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 대한 지지를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행간에서 드러나는 내용, 즉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대낮이나 대지라는 말로 상징하기도 했고, ‘운명애’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 말, “아아 이것이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지상에서의 우리 인간들의 삶은 참으로 가혹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자라나며 끊임없는 시련에 시달리다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갑니다. 소박한 욕망들조차도 만족에 이르기는 좀처럼 수월하지가 않습니다. 어렵게 뭔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이윽고 늙고 병들며 마침내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삶에는 근원적인 허무가, 절대적 가치의 무가치화가, 그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 허무한 삶은 끝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됩니다. 이른바 ‘동일자의 영원회귀’, 노자는 이걸 ‘반자도지동(되돌아옴은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다람쥐의 쳇바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끝없는 그 반복은 견디기 힘든 질곡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운명조차도 당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제안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니체, 나는 당신의 이런 걸출함을 인정하면서도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해 무조건 박수만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당신의 그 반역이, 비록 눈물겨운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늘 그 어떤 기묘한 불편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 이외에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당신의 말대로 신이 죽고 니힐리즘이 문 앞에 서 있으며 초인이 새로운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 인간의 삶은 그 깃발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무래도 그것은 미덥지가 않습니다.

당신이 부정한 그 전통적 가치들은, 역사의 과정에서 비록 적지 않은 부작용들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절반’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닐는지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핵심에 있는 ‘창조’와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창조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된 우리의 이성은 그 어떤 첨단과학의 설명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며, 또한 설명 없이 내던져두는 것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세계현상에 대한 의문을 한칼에 해결해주는 기막힌 설명의 장치가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삶의 세계에 존재하는 엄연한 하나의 객관적 현상입니다. 현실 속의 기독교와 그 교회가 과연 그 사랑을 제대로 실천해왔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론의 소지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작지 않은 공적을 함부로 부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서도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채 사라져간 수많은 삶의 드라마에서는 사랑이 이룩했던 무수한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오드리 헵번이나 마더 테레사 같은 이름들도 그런 장면의 한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 숭고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당신이 비판하는 그 노예도덕과 가축도덕이 만일 단순한 ‘거세’가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맹수들의 공격을 따돌려주었다면 그것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인정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이데거에게 -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당신의 말대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삼스럽게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웬 존재? 도대체 왜? 그게 뭐길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그런 의문을 스스로 입 밖에 내보면서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당신의 깊은 뜻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최대 강점은 이러한 문제제기가 한갓된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본질적 문제성(우위-필연성)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무엇보다도 ‘존재’라고 하는 이 주제 자체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묻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의 진정한 모습이 고대 이래로 변질되어왔으며 따라서 진부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에 앞서 당신이 ‘기초적 존재론’이라고 부른 ‘현존재분석’ 내지 ‘실존론적 분석론’을, 즉 주저인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한 인간존재의 탐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막연하게라도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특별한 ‘범례적 존재자’, 즉 존재의 의미가 거기서 드러나는 장소인 인간(현존재)을 그 실마리로 해서 출발합니다.

그 인간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이해를 ‘철저화’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해석학’을 통해 그 과제가 달성될 수 있다고 당신은 착안했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수행은 이른바 ‘일상성-비본래성’의 차원과 ‘전체성-근원성-본래성’의 차원으로 나뉘어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먼저 현존재의 일상성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세계-내-존재’라는 인간의 ‘존재틀’을 밝혀내고, 나아가 ‘마음씀’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의 사물들 및 인간들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배려하고 고려하며 관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당신은 뜻하지 않게, 예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인간론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었습니다.

거기서는 우리 인간들에 관련된 결정적인 여러 가지 근본사실들(‘현사실’ 내지 ‘실존범주’)이 잘 밝혀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계’라는 것이 우리 인간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현사실적인 삶의 터전 내지 환경이라는 것, 그 안에는 우리 자신인 인간 ‘현존재’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비현존재적 존재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무엇 곁에서 살고 있다거나 친숙해 있다는 것, 인간의 ‘공동존재’ 내지 ‘세인’이라는 존재방식, 심정성-이해-말함으로 구체화되는 ‘개시성’, 개별적 존재방식의 전체성인 ‘마음씀’ 등등이 어떠한 것인지를 놀라운 분석력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의 분석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주시하며 그리고 그 사이의 전개에서 이른바 ‘시간성’이라는 것을 읽어냅니다. 즉 인간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인간이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 그것을 향해 앞질러 가보는 ‘선구적 결의’라는 것, 그리고 ‘양심’ ‘부름’ ‘순간’ 등의 이른바 실존주의적인 문제들에 눈길을 보내기도 합니다.

당신이 해석하는 ‘시간’은 참으로 특이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를 당신은 ‘그랬으면서-마주하는-다다름’이라고 풀이합니다. 

즉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리고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때마다 이미 그것으로 존재했던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그런 모습이며, 현재란 단순한 지금이 아니라 인간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사물들과 맞닥뜨리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그런 모습이며, 미래란 인간에게 닥쳐오는 제 3의 어떤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자기의 고유한 가능성에로 다다른다고 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당신은 생각한 것입니다.

요컨대 과거 현재 미래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존재의 시간적 양태들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적 현상이 시간의 진상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과 관련해서 당신은 ‘시숙’이라든지 ‘탈자’라든지 ‘유한’이라든지 하는 시간의 성격들, 그리고 ‘역사성’까지도 그 실체를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시간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방향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존재이해의 ‘지평’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그런 구상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처음 예정했던 대로 수행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처음부터 느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존재는 시간과 함께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죽음을 향한 존재’인 우리가 죽음 이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보면, 그 둘의 필연적 연관성이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곧 존재이고 존재가 곧 시간입니다. 존재와 시간의 그 ‘와’라는 말은 그런 배경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영미로 부치는 철학편지 
벤담에게 - 공리주의를 묻는다 
대학 도서관에서 처음 당신과 마주했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당신의 그 《도덕과 입법의 원리 시설》 첫 페이지 <공리의 원리에 대하여>를 장식했던 저 멋있는 말은 지금 다시 보아도 그대로 멋있습니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지적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 달려 있다.”

‘진리는 그 단순함-당연함 때문에 곧잘 간과된다’는 것을 나는 거듭 강조해왔습니다만, 당신의 이 말도 거기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무언가가 나/우리에게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당신은 이어지는 곳에서 “그것들(고통과 쾌락)이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를 통치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 즉 생각과 말과 행위가 철학이라는 활동 그 자체의 핵심들이니 당신의 통찰은 곧 철학의 한 지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튼 바로 그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리기 위한 지침으로 당신이 제시한 것이 ‘공리의 원리’, 다시 말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지복’, ‘최대 선’이라는 원리였습니다.

그것을 당신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시키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 모든 각각의 행위(개인의 모든 사적인 행위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법령의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것)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 “이해 당사자 측에 쾌락‧선‧행복을 제공하고 손해‧고통‧악‧불행을 방지해주는 경향이 있는 어떤 대상의 속성”이라고도 설명했었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특히 사회적인 차원에서 무언가를 행할 때, 그것이 가장 많은 사람의 가장 큰 행복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는 이 원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요. 

무릇 철학의 효용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의 설정 내지 제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만, 그런 점에서 당신의 손가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지시해주었습니다. 쾌락-행복-공리-선이 그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신은 그것이 ‘최대 다수’의 선이어야 한다고까지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최대 다수를 언급했다고 해서 당신이 구체적인 개인을 무시한 것도 결코 아니었지요.

그 증거로 나는 “개인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함이 없이 사회의 관심을 논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사람들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 너무나 자주 자기 발치의 꽃을 잊어버린다”라는 당신의 말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체의 이익과 부분의 이익이 언제나 배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소수의 이익이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것이거나, 다수의 이익이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대체오 일치합니다.

객관적 ‘정의’라는 조건, ‘정의에 입각한 행복’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필요한 보충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이 저 마이클 샌델과 하나의 콤비를 이루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당신이 ‘최대 다수’를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런 객관적 정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는데, 좀 지나친 두둔일까요?).

러셀에게 - 논리적 분석을 묻는다 
그런데 러셀, 우리 같은 학자들에게는 역시 뭐니뭐니 해도 ‘러셀의 철학’이 곧 러셀입니다. 그 방대한 내용을 다 살펴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지만, 그 핵심을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당신이 제자 비트겐슈타인과 공유하고 있는 (혹은 그로부터 배운) 그 ‘논리적 원자론’입니다.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제2장 ‘철학의 기본으로서의 논리학’에서 당신은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사실을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데 있다”고 천명합니다.

그러니까 언어의 의미는 사실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이 관계 즉 언어와 사실의 완전한 일치를 당신은 “이상적 언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합니다. “사실”이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여러 가지 성질들을 가지며 또한 상호간에 여러 가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복잡하며, 그것을 언명하는 명제들도 복잡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사실에 대응하는 언어들, 즉 이상적 언어를 추구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 언어들을 “분석”합니다. 그 분석의 결과 언어들은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사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합니다. 사실도 그렇고, 그 사실에 대응하는 언어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그런 것을 당신은 “원자적 사실” “원자적 명제”라고 불렀습니다.

원자적 사실은 우리가 지각을 통해 알 수가 있고, 그 진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자적 명제들이 ‘이면’ ‘이고’ ‘이거나’ ‘아닌’ 등으로 결합되어 복잡한 명제를 구성하는 경우, 그것을 당신은 “분자적 명제”라고 불렀습니다(단, “분자적 사실”은 없다고 했죠).

그리고 당신은 이 명제들의 진위를 검토합니다. 원자적 명제의 진위는 지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분자적 명제의 진위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적 명제의 진위에 의존합니다. 즉 분자적 명제는 원자적 명제의 “진리함수”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우기도 하는 저 ‘진리 계산’이 성립되는 거죠. 

‘p이고 q’일 때는, p와 q 모두가 T라야만 T이다. 'p거나 q'일 때는, p와 q 어느 하나만 T라도 T이다. 'p이면 q'일 때는, p가 T인데 q가 F일 때만 F이다. 그렇게 되는 거죠. 이런 식이었지요. 고등학생 때, 이거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일반적 명제"도 검토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같은 게 그런 경우죠. 또 순수한 논리적 명제로서 "항진명제"와 "항위명제[모순명제]"도 검토합니다.

전자는 ‘내일은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같은 경우고, 후자는 ‘내일은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것들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것이고, ‘논리적 규칙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는 점에서 “비의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여기서 당신은 명제의 진위가 순수한 논리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경험적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구별합니다. 기본은 원자적 명제입니다. 이상적 언어에 있어서는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들은 모두 원자적 명제의 진리함수라야 하며, 그런 구조 속에서 모든 언어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당신은 생각합니다. 이렇게 당신은 언어분석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롤스에게 - 정의를 묻는다 
그런데 롤스, 나는 지금 당신의 인간과 삶뿐만 아니라 당신의 철학도 그렇게 조망해봅니다. 그러면 한 가지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은 거의 한평생 ‘정의’라는 주제를 외골수로 파 들어갔던 것입니다. 내가 전공했던 하이데거가 ‘존재’라는 주제를 그렇게 했던 것과도 비견되는군요.

물론 그것과 관련된 엄청나게 다양하고 치밀한 논의들이 그 안에 당연히 있습니다만, 일이관지하는 그 핵심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기도 쉽지는 않은데 참 존경스럽습니다.

내가 그 옛날 당신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로 그 점 때문에 끌렸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리고 인간의 세상이라는 것이 ‘욕망에 의해 이끌린다’고, 그리고 ‘욕망의 대상은 한정돼 있다’고, 그래서 ‘욕망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충돌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충돌의 조정기준이 정의다’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정의’를 언급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그 때문에 공자의 ‘도’를 좋아했었고, 플라톤의 ‘정의’를 좋아했었고, 포퍼의 ‘열린 사회’를 좋아했었고, 하버마스의 ‘진리’를 좋아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직 정의만이 개인의 욕망을 제한할 수 있는 혹은 욕망의 대상을 양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나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 그 정의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턱이 없었던 게지요.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그 《정의론》과 《공정으로서의 정의》 등에서 당신은 ‘공정’이라는 것을 그 답으로 제시했습니다. 즉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기본이념”으로 역설했지요. 그 공정은 당신이 말하는 “당사자들” 간의 공정입니다. 그 당사자들은 인간들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가 읽은 한, 당신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더군요.

하나는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란 비록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협동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해관계의 일치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특성도 갖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불가침성’과 ‘이해관계의 상충’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전제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 조정인 ‘정의’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 정의를 통해 당신은 “잘 질서 잡힌 사회”를 이룩하고 싶었던 겁니다. 즉 “그 성원들의 선을 증진해줄 뿐 아니라 공공적 정의관에 의해 효율적으로 규제되는 사회”를 말이죠.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공공적 정의’임이 여기서 이미 드러납니다. 

그런데 당신의 특징 혹은 매력은 그런 정의를 이미 주어진 어떤 초월적 존재로 전제하지 않고 당사자들 간의 합리적 절차에 의한 합의로 (“상호 간에 상충하는 요구를 조정하는 방식”인 합의로) 즉 “합리적 선택”으로 “약정”으로 결정 혹은 채택한다는 것입니다(이는 하버마스의 진리론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지적 소유권이 문제될 정도?).

‘정의’ ‘공정’ 뿐만 아니라 ‘당사자’ ‘사회’ ‘협동체’ ‘이익-이해’ ‘요구’ ‘불가침성’ ‘상충’ ‘질서’ ‘선’ ‘공공적’ ‘규제’뿐만 아니라, ‘합리’ ‘절차’ ‘합의’ ‘선택’ ‘약정’ 이런 단어들도 하나하나 다 롤스의 철학이라고 나는 평가합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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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브리핑스

생태제국주의 독재 끝내기

지난 90년대 이후,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선진국들의 이해는 저개발 국가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그로 인해 여전히 개발이 필요한 전 세계 인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