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4주차

BOOK SUMMARY
 인문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

저자 시몬 페레스(역:윤종록)
출판 쌤앤파커스
출간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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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


다시 살아서 만나자는 약속 - 국가의 부름

‘비쉬네바’로 알려진 우리 슈테틀은 폴란드와 러시아의 국경 근처 가느다란 모양의 땅 위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 숲에 둘러싸인 채 겉으로는 마치 영원한 겨울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태양을 거의 못 보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추위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슈테틀에는 다정함과 따뜻함, 마법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내 어머니 사라는 명석하고 다정한 분으로 사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셨다. 어머니의 삶에 독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거의 없었고, 어머니는 그 즐거움을 나와 함께 나눴다. 내 아버지 아츠하크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목재 상인이었다. 따뜻하고 너그러우며 사랑이 충만한데다 활기와 근면함까지 갖춘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존경할 만한 분이셨고, 슈테틀의 모든 주민들이 지혜를 얻기 위해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에 떠밀려 우리는 떠나야 했다. 1932년에 아버지 혼자서 먼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받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나이도 많으셨고 마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비쉬네바에 남기로 결정하셨다. 할아버지는 비쉬네바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우리가 떠나고 몇 년 후에 나치군이 숲을 통해 마을로 쳐들어왔고, 집에서 끌려나온 유대인들은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나는 여전히 어려운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정신을 느끼곤 한다.


이스라엘 정치계에서 60년을 보낸 후에 결국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내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내가 상상했던 봉사는, 정부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개간하고 밭에서 농작물을 키우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이었다. 최초의 키부츠로 알려진 정착지는 데가니아라고 불렸으며, 유럽에서 탈출한 젊은 개척자 무리가 1910년 요르단 계곡에 설립했다. 개척자들은 아무리 혹독한 환경이라도 야자수와 농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만들거나 가축을 키우며 전혀 다른 새로운 곳으로 만들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청소년 운동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유대인 나라의 위대한 선구자들의 가르침을 배웠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했지만, 청소년 운동에서는 꿈을 꾸었다. 나는 도시의 시끌벅적함보다 밭이나 농장의 고요함을 좋아했고, 척박한 땅을 탈바꿈시키는 사명을 실현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그룹의 리더였던 엘하난 이샤이는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을 이해해주었고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었다. “내 생각엔 ‘벤쉐멘 프로그램’을 고려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어느 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고, 그 말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벤쉐멘 청소년마을’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소년소녀들은 메마른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기술, 양떼를 몰거나 소와 염소의 젖을 짜는 방법, 단단하고 소금기 있는 땅에 씨앗을 심고 양분을 주는 방법, 낫을 제대로 갈고 사용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또한 주변 팔레스타인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이곳의 소년소녀들은 군대식 훈련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키부츠가 추구하는 가치, 즉 평등하게 함께 일하는 법과 공동체를 세우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나는 1938년에 넘쳐흐르는 호기심과 학습의 열망을 안고 벤쉐멘에 도착했다. 친구도 사귀고 때때로 재미있게 놀기도 했지만, 우리는 훨씬 더 원대한 꿈과 무거운 사명을 가진 조직의 일원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곳은 벤쉐멘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내 정치적 견해를 가다듬고 그 견해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기회가 주어졌던 곳이었다. 실로 우리가 음지에서 갈고 다듬었던 견해들은, 벤쉐멘의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모든 것보다 우리를 더 크게 성장시켜주었다. 우리는 똑같은 견해를 나눴지만 이견은 빈번하게 충돌했다. 몇몇 스탈린주의자들은 더욱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바탕으로 한 유대 국가를 주장했고, 키부츠 역시 이념적으로 집단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나는 스탈린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왜곡했으며, 스탈린 정부의 방식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저주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었으며, 우리의 비밀스러운 모임에서 점점 더 중요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벤쉐멘에서 보낸 두 번째 여름, 내가 활동했던 청소년 운동 하노어 하오베드에서 내가 전당대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대표의 자리를 받아들이고 몇 달 후, 나는 하노어 하오베드를 대표하여 북쪽에 있는 하이파를 방문해야 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으나 나를 맘에 들어 한 그곳의 교사이자 위대한 시오니스트 사상가인 베를 카츠넬슨에게 말하자, 그는 더 좋은 계획을 권했다. “다음 주에 차를 타고 하이파로 가는 친구가 한 명 있단다. 그 차에 네가 탈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어.” “다비드 벤구리온이란다.”그는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으며, 전략가이자 철학가이기도 했다. 미래의 국가를 위한 그의 비전은 내게 영감을 주었고, 그가 투쟁에서 보였던 절박함은 끊임없는 감탄의 대상이었다.


1945년 9월 28일, 텔아비브의 무그라비 극장에서 하노어 하오베드 전당대회의 개회가 선언되었다. 의제의 첫 순서 중 하나는 ‘공약’ 선정이었다. 첫 공약은 하노어 하오베드의 사무총장인 빈야민 초츨로브킨의 것으로, ‘위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는 제안은 내 것이었는데 마파이의 입장을 대변했다. 투표 결과, 내 제안이 승리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는 하노어 하오베드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내가 위대한 영웅들로 칭송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


1939년 9월,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정복과 유대인 말살의 길에 올랐다. 이틀 후,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방임과 동시에 두 번째로 가장 위험한 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이 여기저기에서 준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벤구리온의 태세변화에 반대하는 좌파가 많았다. 그들의 주장에 벤구리온은 격분했다. 1946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바젤에 모일 시간이 되었다. 마파이는 2명의 젊은 구성원을 대폭 확대된 대의원단에 포함시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곧 나는 벤구리온이 그중 1명으로 나를 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의 대의원단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미국에서 왔으며,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유럽 쪽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벤구리온은 열의가 없는 대의원들의 태도에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첫 회의가 끝날 즈음, 벤구리온의 제안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명확했고, 그는 극도로 불만스러워졌다. 다음날 아침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벤구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회의에 대한 불만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벤구리온의 아내 폴라가 어두운 낯빛으로 대회장에 들어오더니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떠나려고 해요.”


우리는 대회장을 나가서 벤구리온이 지내는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곳엔 벤구리온이 등을 돌리고 서서 화난 채로 여행가방 안에 옷을 쑤셔 넣고 있었다. 우리는 벤구리온에게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의 비전을 마파이에게 납득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진지하게 고심한 끝에, 벤구리온은 드디어 동의했다. 그날 저녁, 마파이 회의가 소집되었다. 무자비할 만큼 치열한 논쟁과 말다툼, 감정싸움이 오갔고, 결국 해가 뜰 무렵에 마지막 투표가 끝났다. 벤구리온이 면도날 차이의 과반수로 승리한 것이다. 이 승리는 굉장히 중요했고, 당면한 정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논쟁은 벤구리온의 훌륭한 논리와 달변, 내가 굳게 믿었던 그의 설득력 있는 주장 덕분에 승리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보았다. 벤구리온은 불만과 실망으로 격분해서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순간에, 경험도 없고 지혜도 없는 풋내기 젊은 청년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호텔방에서의 그 순간을, 내가 얼마나 자주 다시 떠올리게 될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 디모나의 전설과 유산

1993년 9월 13일 아침, 나는 복잡한 벽화가 그려진 동그란 방에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고풍스러운 시계가 11시를 알리자 우리는 자리를 정돈하고 열을 맞추어 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인 첫 평화협정을 알리는 의식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려던 결정도, 우리의 적과 협상하려 했던 시도도 아닌, 40년 전 벤구리온과 야당에서 외롭게 싸워왔던 순간이 그려졌다.


때는 1956년 10월 24일이었다. 수에즈 작전에 대해 최종 계획을 세우기 위해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만났던 센 강변어귀 세브르의 한 저택에서 벤구리온과 함께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인 크리스티앙피노, 국방부 장관 모리스 부르쥬 모누리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순간이었고, 나는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벤구리온과 나는 예전부터 원자력 에너지에 엄청남 지적 호기심을 갖고 관심 있게 주시했다. 원자력이야말로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커다란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벤구리온은 자연이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은 것들을 오직 과학만이 채워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최첨단 기술에 투자하고 대학에서 전문가와 재능 있는 청년들을 모음으로써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술지식을 이스라엘에 꽃피우고자 했다. 그러나 실상은 과학기술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동기로 확장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짓는 것이라고 말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했고, 가장 가깝게 우정을 쌓은 프랑스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원자력 분야에 있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명백하고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프랑스에 평화를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원자로를 판매하라고 요구했다. 이건 전례 없는 요청이었고,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피노와 모누리는 나의 요청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논의를 좀 해야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논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동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프랑스 고위 지도층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는데, 예루살렘은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했다. 과학자들의 반응도 냉소적이었다. 우리는 돈도 없고, 기술자도 없으며, 물리학계의 지지도 받지 못했고, 야당과 군부에게도 거절당했다.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원은, 프랑스의 약속과 우리 두 사람이 전부였다. 


나는 벤구리온과의 ‘흔치 않은 관계’를 종종 떠올렸다. 한 나라의 총리가 일개 직원인 한 젊은 청년에게 여지가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수없이 맡겼다. 몇 번이고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이상적인 답은 ‘포기’였지만, 나는 그를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 세계의 믿을 만한 이스라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극비사항인 원자로 프로젝트에 대해 개인적으로 간곡하게 호소했다. 그렇게 하여 짧은 시간 내에 원자로 비용의 절반을 충당할 정도의 큰 금액을 모았다. 다행히 우리는 도스트로브스키를 초대위원으로 영입할 수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촉망받는 과학자로 수년 전 중수 제조과정을 고안하여 프랑스에게 판매했었다. 뿐만 아니라 에른스트 데이비드 베르그만도 건너왔다. 당시 폭약제조에 쓰이는 아세톤의 대량 생산법을 개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를 믿고 맡길 총책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안 가 후보자 목록에서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있었다.


마네스 프랫은 현장 경험이 많은 전도유망한 과학자였다. 그는 매사에 발 빠르고 민첩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끈질기게 완벽함을 요구했다. 내가 총책임자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당장이라도 나를 한 대 때릴 기세였다. 나는 그에게 3개월 간 프랑스로 가서 원자로 건설을 도울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하고 오는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가 3개월 후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으면, 원래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그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아는 최고의 원자력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자본과 인력을 갖춘 뒤, 남은 일은 프랑스와의 파트너십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것이었다. 1957년 여름, 나는 파리로 가서 협약을 맺었다. 그 시기에 부르쥬 모누리는 새로운 총리가 되었고, 기 몰레 정보는 6월에 무너졌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타이밍 측면에서 뜻밖의 호재였다. 우리는 함께 두 국가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합의해 나갔다. 모누리는 협조적이었지만, 외교부 장관이 된 피노는 단어선택에 대해 이런저런 우려를 제기했다. 하지만 우리가 피노의 반론을 수정해 나가던 시기에 모누리 정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먼저 피노를 찾아갔다.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지만, 자신의 임기가 끝나간다는 사실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협의안에 단호하게 반대하겠다는 의지를 바로 밝혔다.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그리고 진정성 있게 현재 상황에 대한 고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시몬, 자네의 주장을 받아들이겠네.” “자네는 나에게 확신을 심어줬어.” “피노, 당신의 협의안에 동의한다는 것을 자필로 적어주십시오. 제가 곧바로 그 서신을 총리께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나는 당장 의회로 갔다.


“봉쥬르, 시몬!” 나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바로 부르쥬 모누리였다. 나는 그에게 피노가 작성한 편지를 보여주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회의를 열어 임기가 끝나기 전에 협정 체결을 완료해달라고 부탁했다. 모누리는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 모누리 정부는 무너졌다. 그리고 협의안 문서 역시 결국 서명을 얻지 못했다. “자네를 보니 내 사회주의 친구 피노가 동의한 게 이해되는군.”그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책상에서 편지지를 가져온 뒤, 프랑스 원자력위원장에게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 협약에 승인했으며, 원자력위원장은 이를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글을 써내려갔다. 결국 그다음 달에 프랑스 정부는 이스라엘에 1,000만 달러의 신용한도를 개설해주었다. 마침내 원자로 공사를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1959년 11월 3일, 나는 36세의 나이로 국회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원자로 건설 또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 해 9월, 나는 서아프리카에 있었다. 세네갈 공화국의 첫 대통령인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네갈 방문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즉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라는 긴급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하니 모사드 국장인 이셔 하렐과 골다 메이어가 헬리콥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보게.” 첫 번째는, 최근 소련 연방이 디모나 근방을 비행하다 건설현장 사진을 찍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소련 외교부 장관이 계획에 없던 워싱턴을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 정부가 디모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 범죄라고 주장하고, 외교부 장관이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의 개입을 요구했을 거라고 걱정했다. 나 역시 집중해서 듣고 그들의 우려에 공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먼저 나서서 행동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될 거라고 의견을 냈다. 벤구리온은 내 의견의 동의했다.


1960년 12월 18일, 내 예상이 맞았는지 궁금했다. 수일 전, 각국의 신문사들은 익명의 작은 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특보를 냈다. 그리고 곧이어 런던의 한 신문은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지목했다. 런던의 한 신문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언급한 지 5일째 되는 날,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국회에서 공식발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현재 네게브에 건설 중인 연구용 원자로는 이스라엘 전문가들의 감독 하에 건설되고 있으며, 오직 평화적인 목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1961년 봄, 벤구리온은 존 F.케네디 대통령과 좀 도 심도 깊은 토론을 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우리가 핵무기도, 악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심어주었다. 


케네디의 근동 고문인 마이크 펠드만은 이스라엘 대사 아브라함 ‘아비’ 하만과 나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내가 이스라엘의 핵개발 사업 담당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펠드만은 내게 “대통령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하신다.”고 전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나에게 미국 정부가 다방면에서 수집한 모든 정보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에 관해 말해줄 것이 있습니까? 핵무기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의도는 무엇이죠, 페레스 씨?”이런 상황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안심시켰다. “대통령 각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중동에서 핵무기를 처음으로 꺼내드는 쪽이 절대로 저희는 아닐 것이라는 점입니다.”케네디 대통령은 답변을 듣고 만족스러워했고, 몇 마디 사교적인 대화가 오가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끝났다. 내가 백악관 문을 나서자 이스라엘 대사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한이 있습니까? 당신은 방금 정부의 허락도 없이 핵무기 정책을 만들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로 돌아오자 비난은 더 심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도 내 표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놀랍게도 케네디 대통령 앞에서 내가 한 발언은 이스라엘의 장기정책이 되었다. 핵무기의 존재를 확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핵 모호성’이라는 이름의 전략이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핵 모호성’이 가지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파괴할 힘을 가졌다고 믿게 되었고, 이스라엘을 파괴하려는 야망을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했다. 핵 억지력은 평화의 가능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요르단과도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슬로에 가기 위해 디모나를 건설했다고 얘기했다. 중요한 것은 원자력 자체가 아닌, 원자로의 영향력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절대 파괴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표지판이 되어 준 것이다. 또한 이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길을 알려주었다. 한때 실패로 기록되었던 디모나에서의 노력은, 결국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맺었던 약속의 결실로 이루어졌음을 나는 깨달았다.



스타트업의 천국을 만들다 - 창업국가 건설

초기의 유대인 개척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이스라엘 땅에 도착했고,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거의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세워진 지 거의 70년이 지난 오늘날 이스라엘은 영구적인 빈곤으로 몸살을 앓는 가망 없는 사막이 아니다. 800만이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이 나라에서 6,000개 이상의 스타트업 기업이 탄생했다. 천연자원이 없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성에 의지하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은, 항상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런 불가피한 위태로움이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참된 힘이 되었다.


1963년에 바이츠만연구소에서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가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제였다. 거기에서 내가 본 것은 정말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거대한 팀이 해야 하는 일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이 놀라운 기계를 보고, 나는 군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장군이 이 거대한 기계를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이걸로 무얼 할 수 있죠?”그때 나는 아무리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이라도 비관적인 생각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미 경험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의 반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나를 도와준 동료 연구자들은 창의적인 정신을 발휘해 곧 그 비관주의자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개발된 기술은 빈번히 다른 목적들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무기체계를 개선하는 데 쓰인 그 기술은 심지어 훗날 전 세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내는 의료용 영상기기에도 쓰이게 되었다.


1984년 선거가 치러지던 때에 리쿠드당이 이끌던 우익정당들이 7년간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경제와 국가안보 모두가 점점 더 악화되었고, 유권자들은 변화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총리로 취임하던 날, 이스라엘의 연간 인플레이션 증가율은 경악스럽게도 무려 400%에 도달했었다. 뿐만 아니라,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아랍 회원국들은 욤 키푸르 전쟁 때 이스라엘을 도운 나라들에게 석유 엠바고를 선언하여 국제적인 불황을 초래했다. 경제를 다시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은 경제 전반에 대한 체질개선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서하는 데는 큰 고통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국소마취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수술을 감행해야만 하는 위험한 도전을 받아들였다.


나는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경제 담당 팀에게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완벽한 브리핑을 부탁했다. 경제 팀이 제안한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으로부터 우선 차관제공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취임한 직후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 국무장관인 조지 슐츠를 만났다. 그의 주선 하에 존경받는 전 백악관 경제고문 허버트 스타인과도 만났다. 그리고 우리 경제 팀 전문가들이 구상하는 계획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회담을 마치고 가장 난해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이 계획의 실행에 동의하게 그리고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다.


1985년 6월 첫 주에, 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정부 산하의 경제학자 팀을 우리 집으로 불러 모았다. 이후 3주 동안 실무진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계획과 조건들을 조율하고, 정확하고 전문적인 언어로 입법안을 다듬었다. 나는 각 부처의 예산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삭감할 항목들을 골랐다. 누군가가 반대하면 계획의 세세한 항목까지 따지는 것으로 대응했다. 아침이 되자 예산삭감은 완료되었고, 우리의 경제회생 계획은 장관들의 과반수의 지지를 얻을 것이 분명해졌다. 15명의 장관이 계획을 승인했고, 7명은 반대했으며, 3명은 기권했다.


1985년 7월 1일 아침, 정부가 승인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그리고 왜 했는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경제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를 이해시켜야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방송국 기술자들이 일제히 일어나더니 세트 밖으로 걸어 나가버렸다. “방송노조를 장악하고 있는 히스타두르트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방송노조에 연락해 즉시 송출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총리님의 연설이 방송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나는 그들이 동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날 이후 정부와 히스타두르트는 2주간 협상에 돌입했다. 나는 최대한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 프로그램이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우리의 후세들을 위해 이스라엘 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수단임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결국 노사정 모두가 합의에 이르렀다.


노력의 결실을 보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1985년 8월에, 인플레이션은 2.5%로 놀라울 정도로 하락했다. 그 해 말에는 인플레이션이 1.5%로 떨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감소했다. 결국 이 계획은 전 세계적으로 칭송받았으며, 명성 있는 대학교의 강의 및 논문 주제가 되어 주목받기도 했다.


다음으로, 벤처캐피탈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벤처캐피탈을 육성시킬 방법은, 이스라엘이 투자자들에게 유별나게 매력적인 장소가 되는 것뿐이다. 나는 해외의 투자를 이스라엘로 유치하는 것이 내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은 그곳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라고 호소했다. 유럽의 지도자들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유럽에 자리 잡았던 정부 지원의 자금과 이스라엘의 벤처 프로그램 연결 사업을 밀어붙였다. 수백 명의 대기업 리더들과 만나 이스라엘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막의 자그마한 한 조각이었던 나라가 최첨단 기술강국으로 탈바꿈한 이야기를 알리며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이 작전은 성공했다. 전 세계 유명 벤처펀드들이 이스라엘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이스라엘이 기술 분야에서 얼마나 위대한지 설명하거나 납득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관직을 떠난 후에도 나는 기술 분야의 일을 계속했고 내 후임자인 레우벤 리블린 대통령 곁에서 ‘이스라엘 혁신센터’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6,000개의 스타트업들 가운데, 2016년에 무려 90곳의 기업이 나스닥에 상장해 거래되고 있으며, 400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최첨단 기술회사들은 아직도 매년 수백 억 달러의 투자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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