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더 알고 싶은 심리학

저자 한국심리학회
출판 학지사
출간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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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고 싶은 심리학


메타인지: 생각을 보는 능력이 진짜 능력이다

자신의 생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메타인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네 혹은 아니요로, 가능한 한 빠르게 대답해 주세요.”라고 한 뒤 “우리나라 수도의 이름을 아시나요?”라고 묻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라고 매우 빠르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이어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과테말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의 이름을 아시나요?”라고 말이다. 아마도 ‘아니요’라는 대답이 매우 빠르게 나올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네’라는 대답과 거의 같은 속도로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것이 인간의 두뇌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며 최소한 현재까지의 컴퓨터나 AI가 지니고 있지 못한 기능이기도 하다.


가끔씩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내가 찾는 파일이나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검색 기능을 사용한다. 검색 창에 파일 제목을 입력한 뒤 ‘검색’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는 열심히 그 제목에 해당하는 파일이 있는지를 찾기 시작한다. 만일 검색하고자 하는 파일이 그 컴퓨터에 있다면 찾아가는 과정 어느 지점에서 그 파일의 제목과 하드디스크상 위치를 화면에 출력한다. 하지만 그 파일이 그 컴퓨터에 없다면, 즉 컴퓨터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검색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여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구석구석을 모두 찾아본 뒤에야 ‘그런 파일은 없습니다.’ 혹은 ‘파일을 찾지 못했습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출력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출력할 때 걸리는 시간은 파일을 찾았을 때의 메시지보다 반드시 느리다. 즉, 컴퓨터는 ‘아니요,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네, 알고 있습니다.’라는 대답보다 언제나 느리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두 종류의 대답을 거의 같은 스피드로 할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와 같은 우리의 뇌 구조물이 이를 빠르게 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른다는 대답을 할 때 우리 뇌의 전체를 이른바 ‘스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판단을 내려 주는 걸까? 바로 메타인지가 이 일을 담당하고 있다. ‘안다’와 ‘모른다’ 혹은 ‘할 수 있다’나 ‘할 수 없다’ 등에 대한 판단 말이다.


메타인지는 ‘인지 현상에 대한 지식과 인지’로 정의된다. 인지란 무엇인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생각이다. 따라서 메타인지는 ‘생각에 대한 생각’이며 ‘인지를 인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고차원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즉,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적 활동에 대한 모니터링과 조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과 그 계획의 실행 과정을 평가하는 것에 이르는 추상적 사고의 전반을 아우른다. 그리고 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사고과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이 높기 때문에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배우는 과정에서 어떠한 구체적 활동과 능력이 필요한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 이에 기초해서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하여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방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구성 요소가 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메타인지적 지식이다. 이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실행할 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수학 시험 공부를 하면서 이항정리 부분은 잘 알고 있는데 순열조합과 미적분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지식을 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이 없다면 잘 알고 있는 부분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다. 시험 공부를 할 때 이미 공부해서 잘 알고 있는 부분에는 굳이 계속 눈길을 주면서 정작 잘 모르고 있는 내용이나 단원에는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는 현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이 바로 학습에 대한 판단이다. 자신의 실제 점수보다 점수를 더 낮게 판단하는 경우를 과소 확신이라고 부르며, 더 높게 판단하는 경우는 과잉 확신이 된다. 대부분 우리는 과소 확신보다는 과잉 확신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과소든 과잉이든 그 과함의 크기만큼 우리의 판단과 실제 점수의 차이는 벌어지고, 그 벌어진 차이만큼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며 심지어는 의기소침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메타인지적 기술이다. 이는 메타인지적 지식에 기초하여 발휘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이항정리 부분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 경우,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계속하여 볼지, 아니면 여러 차례에 걸쳐 들여다볼지 등 전략을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니 메타인지적 기술은 메타인지적 지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다. 즉, 메타인지적 지식이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메타인지와 관련된 이 두 측면은 어린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다양한 인지 능력은 성장을 해 가면서 점차 발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메타인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연령이 낮을수록 자신의 기억력 점수를 부정확하게 예측하면서도 기억 능력은 과잉 확신하는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뇌과학으로 본 착한 사람의 속마음

공감의 자기중심성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과 이타성 간에는 과연 어떠한 관련성이 있을까? 아마도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공감 능력이야말로 이타성의 초석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공감이라 하면 항상 좋은 면만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우리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쉬운 분노나 질투심과 같은 감정에도 쉽게 공감하곤 한다. 상식적으로 공감이란 타인과 공유하는 감정을 말한다. 하지만 과연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이 정확히 같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감정과 얼마나 유사해야만 이를 공감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공감이 타인의 감정보다 자신의 과거 경험들 혹은 자신의 현재 신체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들이 있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가상의 등산객들을 묘사하는 글을 읽고 그들의 심정을 추측해 볼 것을 요구받았다. 그런데 참가자들의 절반은 체육관 앞에서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 실험에 참가했고 나머지 절반은 최소 20분 동안 운동을 마친 직후에 참가했다. 실험 결과, 운동 직후 참여한 집단은 운동 직전 참여한 집단에 비해 등산객들이 갈증 때문에 힘들어할 것이며 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추측한 정도가 훨씬 더 높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어쩌면 타인의 감정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의 경험을 재료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용된 재료가 다를 경우 그 결과물도 다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내부 감각신호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 자신의 심장 박동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타인의 얼굴 표정을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타인의 고통에 더 잘 공감한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는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과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정보 처리의 오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감능력이 진화과정에서 사라지는 대신 오히려 발달되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그 이유는 공감 자체의 적응적 이로움보다는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가진 적응적 유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범주로 감정을 세분화시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신체로부터 오는 신호들의 미묘한 차이에 보다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적응적인 면에서 훨씬 유리할 수 있다.


분명 공감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능력이지만, 무작정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의 무딘 감정의 틀을 무리하게 타인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 이는 공감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에 가까울 수 있다. 또한 공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는 자칫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작위적인 기준을 만들어 이들에 대한 비난과 경멸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공감이 없는 것보다는 자기중심적인 편향된 공감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히려 공감은, 자신의 감정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고 의식으로 끄집어내어 나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능력이 아닐까? 자신의 감정을 세분화·정교화시키는 과정은 타인과의 공감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며, 타인과의 적극적인 공감을 위해 우리의 열정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향해야 함을 뇌과학은 말해 주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가

이혼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높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혼한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이혼한 당사자들조차도 이혼한 것을 인생의 치명적인 오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은 결혼 파탄의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혼한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기도 한다. 개인의 잘못이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그리고 이겨 내야 할 사회적 압박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혼율과 관련하여 18개국에서 4만 3,071명의 결혼한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과 비교해서 이혼할 확률이 3.62배까지 높다고 한다. 18개국 중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17개 국가에서는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가정의 여성들과 비교해서 이혼율이 높았다.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혼할 확률이 높은 이유는 아이들이 부모의 갈등과 이혼 속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부부 관계적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결혼했을 때 결혼에 헌신하지 못하게 되는 태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가정적 환경을 원인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2018년에 살바토르와 동료들은 그들의 연구에서 입양된 아이가 이혼할 확률은 입양한 부모의 이혼 경력과는 상관관계가 없고, 같이 살지는 않지만 자신을 낳아 준 생물학적 부모의 이혼 경력과 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같은 연구에서 입양한 아이가 이혼할 확률은 생물학적 형제자매의 이혼 확률과 높은 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지만 입양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입양한 부모의 형제자매의 이혼 확률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연구의 가장 큰 의미는 한 개인의 이혼 확률은 환경적 영향보다 유전적인 영향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살바토르와 동료들은 위 연구 결과를 토대로, ① 부정적인 정서를 많이 경험하는 성격적 특성과 ②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낮은 자기절제력과 참을성이 부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혼은 세대 간에 대물림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대물림은 환경적 영향이라기보다는 유전적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은 이혼한 당사자들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수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유전학적 그리고 성격 특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이혼 당사자들의 전적인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정서를 선천적으로 더 많이 경험하고 선천적으로 유전 받은 낮은 자기조절 능력이 이혼의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라면, 우리는 이혼 결정에 관련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느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고 우리의 유전자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한국인이 만든 사회

시험 전날에는 꼭 더 놀고 싶은 이유

이상하게 시험 전날에는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축구 중계방송이 꼭 보고 싶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재미없다고 보지 않던 드라마가 유달리 보고 싶었던 적도 있을 것이다. 일분 일초를 아껴서 공부를 해도 시원찮을 상황에서 오히려 시험 공부에 방해가 되는 그 짓들이 유달리 하고 싶은 이 변태 같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 이런 공부에 방해되는 관심 또한 나를 너무 사랑해서 저지르는 역설적 자해 행동이다. 사람에게 타인의 시선과 평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보는 나 자신이다. 타인이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인상관리 전략은 남이 아닌 나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이 밤새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면, 공부 안 한 척하며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시험을 망치면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바닥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멍청하게도 시험을 망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미리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짓을 일부러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진짜로 왠지 축구가 보고 싶고, 드라마에 관심이 가고, 시와 소설이 땡기고, 그동안 무관심했던 아버지께 죄송하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전략은 무의식에서 실행되고, 나의 의식은 그 결과인 멍청한 욕구만 느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스스로 장애인 되기’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과제 수행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가거나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이런 멍청한 자해 행동은 심리학 실험에서도 반복적으로 검증되었다. 실험참가자에게 매우 생소하거나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도록 한 뒤에, 실제 그들의 수행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작위로 절반의 참가자에게는 ‘아주 잘했다’는 피드백을, 나머지 절반에게는 ‘아주 못했다’는 피드백을 준다. 이들에게 잠시 후 비슷한 과제를 다시 한 번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두 번째 과제를 시작하기 직전에 두 가지의 알약을 보여 주며 선택의 기회를 준다. 그 두 가지 알약 중에 하나는 비슷한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향상시켜줄 것 같은 약(향상 약)으로, 다른 하나는 방해가 될 것 같은 약(방해 약)으로 최근에 개발했다고 설명해 준다.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약을 복용하고 두 번째 과제를 하게 될 거라고 알려 준다. 그리고 참가자에게 자유롭게 자신이 먹을 약을 선택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그 참가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당연히 첫 번째 과제에서 나쁜 결과를 얻은 사람이 향상 약이 더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번째 과제에서 열등한 결과를 얻은 바로 그 사람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약’을 더 선택하기도 한다. 아주 두 번째 과제는 완전히 망칠 작정을 하는 거다. 왜? 어차피 잘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다. 바로 실패의 두려움 때문이다. 실패의 두려움은 흔히 더 잘하려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미리 준비하는 행동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이 너무 커지면 이제는 자포자기하고 실패했을 때의 핑곗거리를 더 열심히 찾게 만들기도 한다. 첫 번째 과제에서 실패했다는 믿음은 비슷한 과제에서 실패의 두려움을 강하게 만들고, 그 두려움은 두 번째 실패를 정당화할 방해하는 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은 미래에 대한 나의 믿음과 기대이다. 내가 목표한 기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을 때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목표한 기준에 다다를 수 없고 너무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는 노력보다는 핑계를 찾게 된다.


당연히 바보 같은 짓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 실패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큰 상처로 남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당연히 그 끝은 결코 해피엔딩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목표로 세운 20등이 어차피 안 될 것 같다고, 80점을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오히려 시험을 못 볼 수밖에 없는 핑계를 열심히 만들어서 30등을 하거나 50점만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에는 실패의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걸 반복하는 사람의 성적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지지 않을까?



심리학이 경제학을 만났을 때: 소비자 선택의 착시

심리학 + 경제학 = 행동경제학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어떤 제품을 선택하고 구매할 경우 제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효용을 정확히 계산해서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제나 최고의 대안을 찾기 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순간, 우리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마도 그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짧은 시간 안에 그 선택을 했어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를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정당화할 테니까.


우리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선택들을 일상에서 무수히 많이 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실수가 몇몇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상식 있고 교양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합리적 행동에도 규칙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들이 누구에게나 나타나며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처럼 사람들의 판단 오류와 실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학문이 바로 경제심리학 혹은 행동경제학이며, 이것이 현재 소비자 심리학 영역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경제학이 접목되어,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설명한다. 즉, 행동경제학의 관점은 비합리적인 소비 사례와 이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력을 통해, 소비자로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현명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여러분이 잘못 판단하기 쉬운 의사결정의 오류와 몇 가지 흥미로운 구매 선택의 착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구체적인 이미지 연상의 효과: 언패킹 효과

구체적인 이미지 연상의 효과: 언패킹 효과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리는 주요 5대 암은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이다. 여기 여러분에게 보험 상품을 권유하는 두 회사가 있다. 한 회사는 ‘주요 5대 암을 보장해 준다.’고 제시하고, 다른 한 회사는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떤 보험회사의 상품에 가입하고 싶은가? 사실 이 두 회사가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사건들에 대해 전체적인 특징을 강조했는지 혹은 세부적으로 자세한 사항을 설명했는지에 대한 부분만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시 방식의 차이에 따라 보험 가입에 대한 여러분의 결정은 바뀔 수 있다. 왜 그럴까? 사건들을 큰 범주로 묶어서 제시하지 않고 낱개로 풀어서 묘사하게 되면, 이 사건은 우리의 머릿속에 더 생생하고 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암을 각각 나열하면 위암에 걸린 주위 사람도 생각이 나고, 얼마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친척도 생각날지 모른다. 주요 5대 암을 보장한다는 메시지보다 훨씬 많은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따라서 사건이 더 현저하게 느껴지고, 미래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사건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지 또는 세부적으로 묘사하는지는 우리가 제품을 선택할 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샐러드를 판매할 때도 단순히 ‘농약을 첨가하지 않은 유기농 샐러드’라고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농약을 첨가하지 않은 토마토, 파프리카, 양상추, 케일, 계란, 드레싱이 들어간 유기농 샐러드’라고 자세하게 내용을 제시하는 상황이 소비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심리학에서 배우는 좋은 삶의 자세

자기중심성을 이겨 내려는 자세

심리학이 밝혀낸 인간의 특징들 중 매우 주목할 만한 특징 하나가 자기중심성이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의 평균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자신이 상식적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상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현상인 허위합의 효과이다.


자기중심성은 자신이 세상의 상식이 되고 싶은 강한 동기와 우리 주변에는 주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그 결과, 심리학에서 가용성이라고 불리는 원리를 따라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우리와 취향과 의견,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떠오른다.


사회심리학자 로스는 이런 우리의 믿음을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명명하고,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의 상당 부분이 이에 근거함을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밝혀 주었다.


자기중심성에 대한 심리학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 하나를 가르쳐 준다. 바로 우리의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사실이 아닐 수 있으며, 타인의 주관이 반드시 오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이다.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자기를 준거점으로 삼아 해석하게 되면, 의견과 취향이 다른 타인은 늘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이며 편향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심리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것을 강하게 권하고 있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존을 인정하는 자세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 이면에 이기적 의도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 그 행위를 더 이상 이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이타적 행위의 결과로 인해 그 행위자에게 유무형의 혜택이 발생해도 그 행위의 이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최근의 긍정심리학 연구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남을 돕는 행위를 장려하고 있다.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전제 하에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이타적 행동을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두 개의 갈등적 입장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필자 연구팀은 순수 이타성의 기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척도를 개발하였다.


연구 결과 우리는 몇 가지 흥미 있는 결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순수 이타성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개인이나 회사의 이타적 행위를 덜 이타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타적 행위 이면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 순수 이타성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은 이타적 행위를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인정해 주는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셋째, 순수 이타성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을 지닌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한 개인이나 기업이 행위로 인해 혜택을 입게 되었을 때 그 개인이나 기업의 행위를 덜 이타적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일상에서 남을 돕는 행위를 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타적 문화는 이타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장려하는 곳에서 자라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숨은 의도가 있는 행위로 의심하거나 이타적 행위의 결과로 인해 혜택이 발생할 때 그 행위의 가치를 폄하하게 되면, 이타적 행위의 동기가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타적 행위를 한 사람을 이기적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자세, 이타적 행위를 한 기업이나 사람을 인정하려는 자세, 궁극적으로 이기성과 이타성의 공존을 인정하려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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